의자에 앉아 있는 눈사람 - 박형준 시인 의자에 앉아 있는 눈사람 박형준 폭설이 내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녹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버려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의자는 때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저녁 햇살에 반쯤은 몸을 내주고 있었다 일생토록 자신의 등으로 주인의 몸무게를 받아주던 .. 좋은 詩 모음 2008.01.25
움직이지 않는 가방 - 조말선 시인 움직이지 않는 가방 조말선 움직이지 않는 가방을 들고 그가 돌아왔다 과묵한 가방이 그의 손에서 달랑거렸다 자크를 연 그의 입에서 하얀 이가 즐겁게 쏟아졌다 무거운 가방에 지친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큐 사인이 떨어졌을 때 관객들은 과묵한 가방을 주목했다 가방은 움직이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 좋은 詩 모음 2008.01.25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 최금진시인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최금진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 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 할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속으로 파리들이 날아 다녔.. 좋은 詩 모음 2008.01.24
회전문 속에 떨어진 가방 회전문 속에 떨어진 가방 최승호 빙글빙글 도는 회전문 속에서, 가방을 놓치고, 회전문 밖으로 나와서 가방을 본다. 이것은 죽음의 한 경험인가. 옷 가방을 떨어뜨린 채, 회전문 밖으로 밀려나오는 알몸이 죽음이라면, 옷 가방 끈을 어깨에 걸친 시절이 삶이었다는 말인가. 회전문 밖에서, 회전문 안에 .. 좋은 詩 모음 2008.01.20
작은 주먹 -정호승시인 작은 주먹 정호승 나에게도 벽을 내리치던 작은 주먹이 있었다 절벽을 내리치며 울던 작은 주먹이 있었다 상처 없는 주먹을 지니지 않고서는 먼 길을 떠날 수 없고 이미 먼 길을 떠난 뒤에는 오히려 상처뿐인 주먹이 힘이 된다고 절벽을 내리치고 꼬꾸라지던 슬픈 주먹이 있었다 물론 허공에 흩날리던 .. 좋은 詩 모음 2008.01.20
꽃 -정호승시인 꽃 정호승 마음 속에 박힌 못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마음 속에 박힌 말뚝을 뽑아 그 자리에 꽃을 심는다. 꽃이 인간의 눈물이랴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꽃이 인간의 꿈이라면 인간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좋은 詩 모음 2008.01.20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시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 좋은 詩 모음 2008.01.20
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시인 누가 울고 간다 문태준 밤 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불러 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 좋은 詩 모음 2008.01.20
삼남에 내리는 눈 - 황동규시인 삼남에 내리는 눈 황동규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胞)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 좋은 詩 모음 2008.01.2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나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좋은 詩 모음 2008.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