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 - 신달자 시인 열애 신달자 손을 베었다 붉은 피가 오래 참았다는 듯 세상의 푸른 동맥 속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잘되었다 며칠 그 상처와 놀겠다 일회용 밴드를 묶다 다시 풀고 상처를 혀로 쓰다듬고 군것질하듯 야금야금 상처를 화나게 하겠다 그래 그렇게 사랑하면 열흘은 거뜬히 지나가겠다 피 흘리는 사랑도 며.. 좋은 詩 모음 2011.02.26
눈 뜨는 봄날 - 최동호 시인 눈 뜨는 봄날 최동호 잠들지 마라. 눈 감으면, 꽃 피는 봄날 밝은 햇빛 저쪽에서 어둡게 산새가 운다. 무너져 내린 성터에는 나비가 될 몇 마리 흙 묻은 벌레들이 부스러진 흙덩이에서 구물댄다. 찬 바닥에 누워 마른 흙 냄새 울컥 들이키면 진한 향기 머금어 덩어리가 목구멍에서 끈적거린다. 잠들지 .. 좋은 詩 모음 2011.02.26
폭설 - 오탁번 시인 폭설(暴雪)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 좋은 詩 모음 2011.02.26
최동호 시인-불꽃 비단벌레 불꽃 비단벌레 최동호 부싯돌에 잠들어 있던 내 사랑아! 푸른 사랑의 섬광 가슴에 지피고 불 속으로 날아가는 무정한 사랑아! 소용돌이 치는 어둠 속에서 탄생한 유성이 지구 저편 하늘을 후려쳐 다른 세상을 열어도 태초의 땅에 뿌리 박혀 침묵하는 서슬 퍼런 불의 사랑아! 유성이 유성의 꼬리를 잘라 .. 좋은 詩 모음 2009.07.09
박라연 시인-동병상련의 동병상련의 박라연 거주 만료된 몸을 나와 저승으로 가던 길목에서 문득 희로애락을 끌고 평생 수고해준 제 몸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진 영혼처럼 그녀 차를 돌려 살던 집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숟가락소리 웃음소리 서류와 옷 가구와 상처와 추억이 빠져나가니 싸늘히 식어버렸구나! 발을 뻗고 앉아 함.. 좋은 詩 모음 2009.07.08
샘가에서 -이성복 시인 샘가에서 이성복 어찌 당신을 스치는 일이 돌연이겠습니까 오랜 옛날 당신에게서 떠나온 후 어두운 곳을 헤매던 일이 저만의 추억이겠습니까 지금 당신은 저의 몸에 젖지 않으므로 저는 깨끗합니다 저의 깨끗함이 어찌 자랑이겠습니까 서러움의 깊은 골을 파며 저는 당신 가슴속을 흐르지만 당신은 .. 좋은 詩 모음 2009.07.08
이성선 시인-티베트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티베트의 어느 스님을 생각하며 이성선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 속에 조용히 앉아 있어도 그의 영혼은 길가에 핀 풀꽃처럼 눈부시다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나비는 푸른 바다에서 일어나는 해처럼 맑은 얼굴로 아침 정원을 산책하며 작은 날개로 시간을 접었다 폈다 한.. 좋은 詩 모음 2009.07.08
야생사과 -나희덕 시인 야생사과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 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 좋은 詩 모음 2009.05.24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 이근화 시인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한 계절에 한 번씩 두통이 오고 두 계절에 한 번씩 이를 뽑는 것 텅 빈 미소와 다정한 주름이 상관하는 내 인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나를 사랑한 개가 있고 나를 몰라보는 개가 있어 하얗게 비듬을 떨어드리며 먼저 죽어가는 개를 위해 .. 좋은 詩 모음 2009.02.13
눈보라 - 황지우 시인 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 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 좋은 詩 모음 2008.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