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앉아 있는 눈사람
박형준
폭설이 내렸다
며칠이 지나도록 녹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
버려진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의자는 때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 보였다
저녁 햇살에 반쯤은 몸을 내주고 있었다
일생토록 자신의 등으로
주인의 몸무게를 받아주던 늙은 조랑말처럼
무릎을 꺾고 풀썩 땅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거기, 눈사람이 앉아 있었다
응달에서 천천히 녹아가며
버려진 의자에 앉아 있었다
한 아이가 처머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꺾어다
떨어진 눈사람의 코를 붙이고 있었다
의자의 발밑으로
눈사람에게서 떨어진 물이
웅덩이를 이루고 있는데
아이는 눈사람의 코를 만지고 있었다
일생을 다하고 곧 의자로서 생명이 사라질
낡은 의자를 위한 , 그런 경건한 저녁이
웅덩이에 그림자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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