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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를 쓰는 사내 - 김충규 시인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25. 08:43


유서를 쓰는 사내

 


김 충 규

 


식구들 모두 잠든 깊은 밤에

서재에 희미한 불 켜놓고 제 묘비명을 쓰는 사내,

그의 두 눈이 인광처럼 빛나고

창가에 와 머문 달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유족에게 남길 한 문장의 묘비명을 위하여

그는 밤마다 문장을 다듬고 다듬는 것이었으니

혹 그 문장이 美文이라면

그의 생애는 죄로 기억되는 일이 더 많을 것

창가의 달이 유일하게 그 문장을 읽고 있었으나

입이 없는 달은 세상에 아무 소문도 퍼뜨리지 못하고

문장을 다듬는 그의 손이 간혹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이 있으니

제 생애에서 송두리째 망각하고 싶은 시간이 있다는 것

망각은커녕 그 어느 시간도

생략할 수 없는 생애의 잔인함,

달이 고름 든 제 옆구리를 스스로 뜯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

아무도 모르게 제 묘비명으로 남길

한 문장을 위하여

몰래 밤을 견디는 사내의

주름 깊은 이마엔 식은 땀이 몽글몽글 열린다

유족에게 남길 묘비명을 쓰는 사내, 그의 생애는

죄보다는 칭송이 더 많을 터

그러나 사내여, 묘비명을 스스로 쓰는 일은

또한 얼마나 헛된 욕심인가

이 땅의 숱한 사내들은 밤마다 몰래 제 뼈를 끄집어내

그 뼈에 묘비명을 새기고 있으니

활활 끓는 화덕으로 제 시신 들어가고 나면

그의 영혼,

뼈를 움켜쥐고 묘비명을 중얼중얼 읊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