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를 쓰는 사내
김 충 규
식구들 모두 잠든 깊은 밤에
서재에 희미한 불 켜놓고 제 묘비명을 쓰는 사내,
그의 두 눈이 인광처럼 빛나고
창가에 와 머문 달이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유족에게 남길 한 문장의 묘비명을 위하여
그는 밤마다 문장을 다듬고 다듬는 것이었으니
혹 그 문장이 美文이라면
그의 생애는 죄로 기억되는 일이 더 많을 것
창가의 달이 유일하게 그 문장을 읽고 있었으나
입이 없는 달은 세상에 아무 소문도 퍼뜨리지 못하고
문장을 다듬는 그의 손이 간혹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이 있으니
제 생애에서 송두리째 망각하고 싶은 시간이 있다는 것
망각은커녕 그 어느 시간도
생략할 수 없는 생애의 잔인함,
달이 고름 든 제 옆구리를 스스로 뜯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
아무도 모르게 제 묘비명으로 남길
한 문장을 위하여
몰래 밤을 견디는 사내의
주름 깊은 이마엔 식은 땀이 몽글몽글 열린다
유족에게 남길 묘비명을 쓰는 사내, 그의 생애는
죄보다는 칭송이 더 많을 터
그러나 사내여, 묘비명을 스스로 쓰는 일은
또한 얼마나 헛된 욕심인가
이 땅의 숱한 사내들은 밤마다 몰래 제 뼈를 끄집어내
그 뼈에 묘비명을 새기고 있으니
활활 끓는 화덕으로 제 시신 들어가고 나면
그의 영혼,
뼈를 움켜쥐고 묘비명을 중얼중얼 읊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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