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에 내리는 눈 - 황동규시인 삼남에 내리는 눈 황동규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 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胞)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 좋은 詩 모음 2008.01.20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시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나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좋은 詩 모음 2008.01.20
작은 배가 있었네 - 강연호시인 작은 배가 있었네 강연호 그대 데불고 간 세월의 강물 따라 나 흘러가지 못했네 어쩌면 그리움 어쩌면 외로움 같은 것들이 사실은 견딜 만한 거 아니냐며 뒷덜미 잡아채는 붉은 신호등에 걸려 멈춘 그 때부터 건널목 이쪽에서 신호 바뀌길 기다리는 동안 서슬 시퍼런 강물 출렁일수록 얼마나 많은 슬.. 좋은 詩 모음 2008.01.20
적막한 바닷가 -송수권시인 적막한 바닷가 송수권 더러는 비워놓고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갯물을 비우듯이 더러는 그리워하며 살 일이다 하루에 한 번씩 저 뻘밭이 밀물을 쳐보내듯이 갈밭머리 해 어스름녘 마른 물꼬를 치려는지 돌아갈 줄 모르는 한 마리 해오라기처럼 먼 산 바래 서서 아, 우리들의 적막한 마음.. 좋은 詩 모음 2008.01.20
사랑의 거처 - 김선우시인 사랑의 거처 김 선 우 살다보면 그렇다지 병마저 사랑해야 하는 때가 온다지 치료하기 어려운 슬픔을 가진 한 얼굴과 우연히 마주칠 때 긴 목의 걸인 여자 ― 나는 자유예요 당신이 얻고자 하는 많은 것들과 아랑곳없는 완전한 폐허예요 가만히 나를 응시하는 눈 나는 텅 빈 집이 된 듯했네 살다보면 .. 좋은 詩 모음 2008.01.20
무밭에서 외 -이상국시인 무밭에서 이상국 무는 제 몸이 집이다 안방이고 변소다 저들이 울타리나 문패도 없이 흙 속에 실오라기 같은 뿌리를 내리고 조금씩 조금씩 생을 늘리는 동안 그래도 뭔가 믿는 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완성해 가다가 어느 날 농부의 손에 뽑혀나갈 때 저들은 순순히 따라 나갔을까, 아니면 .. 좋은 詩 모음 2008.01.20
저녁빛 - 남진우시인 저녁빛 남 진 우 붉은 저녁해 창가에 머물며 내게 이제 긴 밤이 찾아온다 하네…… 붉은빛으로 내 초라한 방안의 책과 옷가지를 비추며 기나긴 하루의 노역이 끝났다 하네…… 놀던 아이들 다 돌아간 다음의 텅 빈 공원 같은 내 마음엔 하루 종일 부우연 먼지만 쌓이고…… 소리 없이 사그라드는 저녁.. 좋은 詩 모음 2008.01.20
물새와 노는 지에꼬 - 다까무라 고오다로 물새와 노는 지에꼬(智惠子) 다까무라 고오다로 쓸쓸한 구쥬구리(九十九里) 모래밭에 앉아서 아내는 논다. 수많은 물새들이 아내의 이름을 부른다. 지이,찌, 찌이, 찌, 찌---- 모래에 조그만 발자국을 찍으며 물새들이 아내에게 다가 온다. 입속말로 늘 뭐라 중얼대는 아내가 두 손을 높이 들고 되부른다.. 좋은 詩 모음 2008.01.20
노독 - 이문재시인 노독 이 문 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 좋은 詩 모음 2008.01.20
방 - 최정례시인 방 최 정례 그 방 앞에는 창을 가리는 커다란 나무가 있다 새벽이면 그 나 무에 천 마리의 새가 날아와 지저귄다 시냇물의 소용돌이처럼 나 무가 운다 나뭇잎 하나하나 새가 되어 뒤흔든다 창문 하나를 달래 보겠다고 나무는 제 잎을 다 떨군다 그 방 안에는 죽음 같은 잠을 자는 이가 있다 제 몸에 시.. 좋은 詩 모음 2008.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