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詩 모음

무밭에서 외 -이상국시인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20. 08:57

무밭에서

 



이상국

 



무는 제 몸이 집이다
안방이고 변소다
저들이 울타리나 문패도 없이
흙 속에 실오라기 같은 뿌리를 내리고
조금씩 조금씩 생을 늘리는 동안
그래도 뭔가 믿는 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완성해 가다가
어느 날 농부의 손에 뽑혀나갈 때
저들은 순순히 따라 나갔을까, 아니면
흙을 붙잡고 안간힘을 썼을까
무밭을 지나다가
군데군데 솎여 나간 자리를 보면
아직 그들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손을 넣어보고 싶다

 

 

 

 

 



있는 힘을 다해

 



이상국

 



해가 지는데
왜가리 한마리
물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

저녁 자시러 나온 것 같은데

그 우아한 목을 길게 빼고
아주 오래 숨을 죽였다가
가끔
있는 힘을 다해
물속에 머릴 처박는 걸 보면

사는 게 다 쉬운 일이 아닌 모양이다


 

 




아침 시장

 



이상국

 

 


 화장을 곱게 한 닭집 여자가 닭들을 좌판 위에 진열하고  있다. 발가벗은 것들을 벌렁 잦혀놓아도 그들은 별로 부끄러워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옆 반찬가게집 주인은 두 무릎을 공손히 꿇고 앉아 김을 접는다. 꼭 예배당에 온 사람 같다. 어느 촌에서 조반이나 자시고 나왔는지 장바닥 목 좋은 곳  깔고 앉으려고 일찍도 나온 할머니가 나생이와 쪽파 뿌리를 손주 머리 빗겨주듯 빗어 단을 묶는다. 각을 뜬지 얼마  안돼 아직 근육이 퍼들쩍거리는 돼지고기를 가득 싣고 가는 리어커를 피하며 출근길의 아가씨가 기겁을 하자 무슨  씹이 어떻다고 씨부렁거리는 리어커꾼의 털모자에서 무럭무럭 김이 솟는다. 아직 봄이 이른데 딸기 빛깔이 꼭 칠한 것처럼 곱다. 순대국밥집 앞의 시멘트바닥에 잘생긴 소머리 하나가 새벽잠을 자다가 끌려나왔는지 꿈꾸는 표정으로 면도를 하고 있다. 갑자기 골목 안이 화안해지며 차 배달 갔다오는 미로다방 아가씨가 어묵가게 아저씨를 향하여 엉덩이를  힘차게 흔들며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