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서정시학 여름호에 발표- '비닐우의', '못과 망치'
못과 망치
황 명 강
지나온 길 지워버리는 법
공구통 안에 쉬고 있는 그들은 알고 있다
한 토막씩 스쳐간 자막의 발자국들
다시 몸 덮쳐와 스멀거려도
수십 배 부풀린 목소리로 담금질 하다보면
백지처럼 모든 것 정지하는 순간이 온다
마지막 떨림으로 지워지는 길
어둠의 이불 덮어 쓴 공구통 안에
못과 망치 누워 있다
체온으로는 데워지지 않는 가슴팍 시려워
서로 눈치 살피며 돌아눕기도 한다
나란히 누워 있어도 다른 꿈길로 접어드는 그들
무엇이 두려운 걸까
단 한번 뜨거운 포옹 뒤로 한 채
침묵의 길 향해 걸어 들어간 못
보이지 않는 곳으로만 흘러가서 이어지는 또 다른 길
불빛들 올망졸망 모여드는 저녁에도
누군가는 여행가방을 챙기고
언덕 위의 소나무는 한 뼘 더 하늘에 닿기 위해
품었던 솔방울 땅위에 내어 던진다
지나온 길 지우고 또 지워내는 일
반복된 일상을 뒤로 밀어내는 것이다
비닐우의
황 명 강
雨衣를 걸치자 온몸이 간질간질 했다
손등에서 배꼽, 아랫도리까지
소름끼칠 듯 돋아난 비늘이 번들거렸다
앞지느러미와 꼬리지느러미가 서투르게
균형을 잡는 순간
두둥실 수면 위로 솟아오른 낯선 세상 하나
빗방울은 달콤했고
가끔 대열 빠져나온 바람이
툭툭 물주름 던졌지만
눈동자는 더 먼 쪽으로 출렁거렸다
오래 기다려준 동백꽃
쭉쭉 뻗은 삼나무의 허벅지
지느러미는 과거와 현재 사이를 미끈거렸다
비늘은 점점 가지런해졌다
어둠 버티던 가시들 볼우물처럼 휘어져
보글보글 웃음소릴 만들어내고
눈치껏 길 엮어내는 부레도 밉지 않았다
서늘해진 시간의 껍질과 플랑크톤과
물안개들이 쌓여 불룩한 배때기
멀미나도록 뒤집기도 하면서
눌러두었던 눈물 시원스레 토해내기도 하면서
세상의 가장 행복했던 물고기,
지금도 동백숲 가로질러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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