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시애' 발표
-나의 문학 나의 길-
문인수 시인의 어눌한 최첨단을 찾아서-대담자 황명강 시인
이것은 호기심과 용기를 동반한 만남이며 그에 관한 기록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한 2008 올해의 시 ‘배꼽’의 작가 문인수 시인을 찾아 나선 일은 경기에 열중인 선수를 트랙 밖으로 불러내는 것만큼 난감했다. 붉고 향기로운 홍로에 스치는 한 바람이 그의 애틋한 사랑과 그늘진 시간을 제대로 만질 수 있겠는가. 가을 산을 올랐다고 해서 가을을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단풍잎의 정서에 묻혀 누군가는 흡족한 계절을 넘을 터이다. 그러므로 햇살 부신 이쪽과 그늘 저쪽이 두루 아름다운 문인수 시인의 몇 잎을 넘겨보는데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시인은 줄무늬 티셔츠에 검은 색 가방을 어깨에 비껴 멘 채로 걸어왔다. 여름의 끝자락에 서있던 매미소리가 주빈처럼 탁자에 올라앉아도 느긋이 담배를 빼무는 시인의 모습은, 모든 통념의 껍질을 벗어던진 듯 여유로웠다.(글, 황명강)
황명강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며칠을 긴장하고 설렜는데 선생님의 편안한 모습을 뵈니 걱정이 옅어집니다. 대담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문인수 반갑습니다. 나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시애’지여서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먼저, 곧 열리게 될 제 14회 김달진문학제에 축하의 마음 전합니다.
황명강 선생님, 제가 들고 온 이 책(2007 미당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시 한 편 골라 읽어주시겠습니까. 어느 행사에서의 시 낭송 하시는 모습이 오래 기억에 남아있거든요.
문인수 (흔쾌히)그럴까요. 하며 성큼 시를 읽기 시작하신다.
그래, 그것은 어느 순간 죽는 자의 몫이겠다.
그 누구도, 하느님도 따로 한 봉지 챙겨 온전히 갖지 못한 하
루가 갔다.
꽃이 피거나 말거나, 시들거나 말거나 또 하루가 갔다.
한 삽 한 삽 퍼 던져 이제 막 무덤을 다 지은 흙처럼
새 길게 날아가 찍은 겨자씨만한 소실점, 서쪽을 찌르며 까무
룩 묻혀버린 허공처럼
하루가 갔다. 그러고 보니 참 송곳 끝 같은 이 느낌, 또 어디
싹트는 미물같다 눈에 안 보일 정도로 첨예하다.
-‘최첨단’(문인수) 전문-
황명강 시를 듣다보니 선생님으로부터 느껴지던 약간의 느슨함과 낭만적 장난기가 일순간에 거두어들여지는데요. 예리한 감각과 따갑고 매서운 눈매가 거기 있습니다.
문인수 시에서의 ‘새 길게 날아가 찍은 겨자씨만한 소실점, 서쪽을 찌르며 까무룩 묻혀버린’, 송곳 끝 같은 그 지점, 그 순간을 늘 응시하게 되지요. 어떤 사물이든 사라지는 모든 것의 끝은 점이라. 점 다음이 허공이고요. 윤회의 의미로 보면 점이 사라져간 순간, 간극의 허공에서는 그 어떤 생명의 싹이 돋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예리한 예감 같은 것이 내 가슴에 꽂힐 때, 그것을 떠나보낼 때,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고 그런 시를 쓰는 재미가 큽니다.
황명강 읽다보면 아픔이 베어나오는 시 ‘뻐꾸기 소리’는 선생님의 가족사를 다룬 작품 인 듯합니다. 60여 년을 훌쩍 거슬러서 선생님의 출생과 성장배경을 듣고 싶습니다.
문인수 ‘뻐꾸기 소리’에는 아버지, 큰형을 빼고는 가족이 모두 등장합니다. 어머니는 현재 99세고 돌아가신 부친은 104세가 되는군요. 20세에 시집 간 큰누나가 2년 전 고혈압으로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이 시의 전반부는 ‘눈물’ 이란 시 전문을 차용했는데 설명적인 서술보다는 설득력을 더 갖는다고 봅니다. 누나가 시집 간 곳은 집에서 30여 분 거리로 등 너머 였는데 어린 나는 누나가 보고 싶어서 곤충채집 한다는 핑계로 찾아갔습니다. 사돈댁에서 삶은 강냉이를 비롯해 푸짐한 대접을 받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빗자루로 나를 때리시는 겁니다. “네 누나 눈에 눈물 많이 뺐겠구나.” 하시는 어머니가 매를 맞으면서 생각해도 참 이상했지요. 본적도 없는데 어떻게 누나가 울었다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계셨을까.
시를 쓰면서 풀어보니까 등너머로 가는 그 길은 그리움이 내는 길이었어요. 문학적으로 보면 그리움은 발길이나 손길이 닿으면 이미 그리움이 아닌데, 누님이 떠난 지금까지도 그 길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네요. 누님이 눈물로 내어준 등 너머 길.
-태어남과 성장-
간단하게 말해야겠네. 1945년 경북 성주군 초전에서 태어나 대구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할 때까지 고향에서 유년을 보냈습니다. 3남 2녀의 막내였던 나는 골목대장이었고 부친의 형제가 7남 2녀로 그 7형제의 자손이 모두 고향에서 살았기 때문에 문씨의 세력이 막강했지요.(웃음)
초전초등학교 다닐 때의 어린 나는 공부를 별로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고 착하기보다는 개구쟁이였습니다. 칭찬 들을 일이 잘 없었어요. 그런데 문학을 만나면서 많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초전초등학교, 성주중학교, 성주농고를 다니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대구고등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대학은 당시 서정주 선생님, 이형기 선생님이 계시던 동국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고 학업 중에 군에 입대하게 됐습니다.
황명강 2007 미당 문학상을 수상하셨고 시집 배꼽이 ‘2008 올해 최고의 시’로 뽑힌 선생님문학의 첫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궁금합니다.
문인수 “찰칵”하고 내 운명을 결정지어버린 날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특별활동이란 것이 최초로 시작됐는데, 나는 국어책을 잘 읽는다는 이유로 문예반에 들었어요. 문예반 선생님은 급사로 출발해 교사가 된 분이었는데 우리에게 “문예”가 무엇인지부터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지었다는 시 ‘고무신과 나’를 큰 소리로 낭송해주었지요. ‘아! 헌 고무신짝처럼 날 버리신 님이시여!’ 문학적 형태의 표현을 처음 접해본 감동과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어요. 그리고는 시나 산문을 한 줄 이상 써오라는 숙제를 내셨죠.
나는 3줄짜리 ‘흰구름’이란 시(둥둥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김삿갓 할아버지의 옷자락인가/둥둥둥 흰 구름 어디로 가나)를 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융단폭격에 가까운 칭찬을 들었습니다.
태어나서 최초로 그렇게 많은 칭찬을 듣고 나니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어요. 그 후론 책을 열심히 읽었고 글을 쓰면서 성격이 정화되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4학년 때의 문예반 활동이 내 운명을 바꿔놓은 거였지요.
황명강 그 이후의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집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함께 활동했던 분들은 현재 문단에서 활동하시는지요?
문인수 중학교 때 칭찬받는 재미로 열심히 글을 썼어요. 전교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고 대구고등학교에 전학해서도 고3 때 전교 백일장 장원을 했습니다. 현재 활동 중인 문인으로는 중학교 1년 후배 ‘박방희’, 성주농고 때는 ‘이완’이라는 친구가 있었고 대구고등학교에서는 동급생 ‘손성호, 이준교’ 후배로는 ‘김종섭 시인, 이채형 소설가, 노명석 작고시인, 이하석 시인, 송재학 시인’ 등입니다. 당시에는 청년 문학도들의 활동이 왕성했는데 나 역시 고등학교 재학 시에 매일신문 학생 발표 면 ‘시원’에 시 ‘부엉이’를, 영남일보에 ‘연가’, 학원이라는 잡지에 ‘코스모스’, ‘해라바기’ 등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대구고등학교 ‘문학의 밤’, ‘시화전’ 등이 문학적인 분위기를 이끌었지요. 그리고는 당시 누구나 선망했던 동국대학교 국문과로 입학했습니다. 서정주 선생님, 조연현 선생님, 이형기 선생님이 계셨던 당시의 동국대학교 동국문학상 최종심에 오르기도 했어요. 군 입대 후부터 문학을 떠났는데, 그것은 어렵기만 한 등단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서였으며 그 어떤 문학적 환경으로부터도 완전히 떠난 소모적이고 소극적인 골방 글쓰기가 시작됐습니다.
시 쓰기가 혼자만의 작업임이 분명하나 그 현장에 있지 않고는 능력이 퇴행한다는 것을 등단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1969년 군제대로부터 1985년 등단까지의 ‘낭인시절’을 돌아보면 외도가 길었습니다. 시인은 감히 될 수 없다고 여기며 혼자서 글을 썼지요. 문학의 길을 권유하는 부인과 내 안의 불꽃을 잠재울 수 없던 시간들을 모아 1984년 심상지에 시를 투고하게 됩니다. 1985년 1월호에 작품이 실리고 등단을 실감한 그 때의 기쁨은 여전히 설렘으로 남아있어요. 이민 갔다가 돌아왔거나 징용 다녀온 사람처럼 문학판에 대한 단절과 정보의 부재가 아득했지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황명강 문단에 데뷔해서 글쓰기를 시작하는 분들이나 후배 문인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문인수 심상사로부터 ‘당선’이라는 통보를 받는 순간 머리에 울리기 시작한 종소리가 그치질 않았어요. 시상식장에 두 형님과 두 누님 등 가족이 모두 참석 할 정도였어요. 스스로 글쓰기 능력에 대한 반성 없이 문단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박제천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셨어요. 오랜 혼자만의 시간을 보상받듯 기고만장 했습니다. 등단 이듬해에 시집을 냈고 설익은 시들을 발표했습니다. 문단생활 10년이 흐르고 나니까 후회스럽데요. 첫 시집은 내 문학의 진로요 디딤돌인데 자기만족을 서두르느라 일을 그르친 거죠. 시집을 서둘러 내거나 많이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황명강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짧게 듣기가 아쉽지만, 첫 시집 ‘늪이 늪에 젖듯이’로부터 출발해 제 7시집 ‘배꼽’에 이르기까지 한번 짚어주시겠습니까?
문인수 질문이 점점 고개를 넘어 오솔길로 접어드는군요. 첫 시집은 좀 성급하게 출간했다는 말을 미리 했지요. 단편적인 시상을 엮은 시집으로서 아쉬움이 남아있습니다. 2시집 ‘세상 모든 길은 집으로 간다’는 고향이라는 공간과 그곳에서의 이런저런 기억들을 구체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시집 ‘뿔’은 진정한 나의 첫 시집으로 삼고 싶은데,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 매달리지 않고 내면의 정서와 삶의 편린들을 엮었습니다. ‘뿔’이야말로 자기연민, 비애, 분노 등을 가장 많이 담아낸 본격적인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4시집 ‘홰치는 산’ 또한 일관된 주제를 담아낸 시집입니다. 농촌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풍경, 아버지의 농경 등을 작정하고 쓴 시집이었습니다. 5시집 ‘동강의 높은 새’는 정선아라리의 한을 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네 한의 정서입니다. 정선이란 공간, 전생의 고향이듯 내 것인 정선, 그곳에 가면 다 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한과 홧병은 외국으로 번역이 안 되는 우리의 정서입니다. 그 후 7년 만에 내놓은 제 6시집 ‘쉬!’는 세월이 오래 걸린 만큼 일관된 주제 없이 자유롭게 이런저런 경향의 시들을 모았습니다. 한편 마다의 완성도에 집중한 시집입니다. 그리고 7시집 ‘배꼽’이 남았네요. 문학성이 있는 시집이라서 일반 독자들과의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7쇄를 찍었어요. ‘2008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돼 금메달 1냥을 받아 부인에게 넘겼습니다. 7쇄라는 성과를 거두게 한 고마운 시집이지요.
황명강 선생님 시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언저리에서 고향이라는 공간을 지나 자아의 세계, 다시 농촌사람들과 농경, 정선행, 그리고 시집 ‘배꼽’에서는 정서와 언어의 압축된 최고점을 만나게 되는데요. 앞으로 또 다른 경향의 시를 모색하고 계시는지요.
문인수 올해는 동시를 많이 썼어요. 동시집을 준비하고 있고요. 늘 생각하고 있었던 건데 사랑에 대한 시를 쓸까 합니다. 현실적인 연애시는 경험이 없고 해서 못 쓸 거고 신앙시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장되지 않고 진부하지 않은, 연애하듯 쓰는 신앙시(종교 카톨릭)는 문학적인 완성도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명강 기왕 말이 나왔으니 선생님이 사랑한 여인들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그들로 인해 쓴 시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문인수 나의 첫 여인은 어머니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요. 완고한 아버지께 순응한, 부지런함을 인정받은 분이셨어요.(담배에 불을 붙이며) 어머니란 달과 같은 이미지라서 용서 안 되고, 안 녹고 위로 못 받을 일이 없지요. 출타하신 아버지를 기다리곤 하던 그분을 떠올리다보면 한 남자의 아내로도 행복한 분이었다는 느낌입니다. 큰 누님은 어머니처럼 푸근한 사랑으로 머물러 있고 차갑고도 예쁘던 둘째 누이는 나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그의 일기장을 훔쳐보게 한 장본인이었어요. 연애라면 짝사랑을 한 적이 있는데, 중학교 시절 한 살 어린 양조장집 딸을 좋아했어요. 도시에서 공부하던 그 애가 방학에 돌아오면 하루 종일 그 집 앞을 서성거렸죠. 2~3초 훔쳐보는 정도였지만요. 열렬한 연애, 특히 글 쓰는 이들에겐 모호한 열망으로 남아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어요. 그러고 보니 내 시에는 연시가 별로 없습니다. 아, 최근 작품 ‘굿모닝’, ‘황조가’, ‘귀’ 등을 소개할까요. 가끔 연시를 쓰긴 했지만 사적인 정서라서 발표는 안했죠.
황명강 그렇다면 선생님의 영원한 연인 사모님과의 사랑은 어떤 빛깔일까요.
문인수 여인과의 사랑은 지속적이지 못하나 시와의 사랑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영육을 다하여 사랑했다면 그것은 제게 여인이 아니라 시라고 여겨집니다. 글쎄요. 그렇게 완벽한 사랑이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사람과는 영혼을 던질 만한 사랑을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변함없는 성원자이며 열성 독자인 부인 전정숙은(경남 함양군 서상 출신) 중매로 만났고 서로의 사랑은 변함없습니다. 1975년 결혼이후 지금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내 뒷바라지를 하면서 불평 없이 가정을 지켜왔습니다. 요즘도 상을 받는다거나 신문에 내 이름이 한 귀퉁이에 나오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어요. 그 마음 애틋하도록 고맙고 큰 힘이 됩니다.
황명강 가정 안에서 그려지는 선생님 모습이 궁금합니다.
문인수 딱히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글쓰기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모 대학 행정직에 재직 중인 장남(동섭)과 호주 유학 중인 장녀(효원)에게 때로는 미안한 아버지였는데 최근 들어 힘들었던 시간을 모두 보상받았습니다. 큰 상을 수상한 덕분입니다. 가족 모두 내가 시인이란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합니다. 감사한 일이지요. 세상의 잣대로 보면 별 의미 없을 신문 기사 몇 줄에도 좋아라고 박수를 보내는 나의 반쪽이 늘 고맙지요.
황명강 현대사회는 네트워크화 되어있고 그 안에서 많거나 적게 주고받으면서 생활이 영위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시는 우리 사회에서 어떤 역을 맡고 있음일까요.
문인수 시와 함께 한 긴 시간들, 시 쓰기에 대해서는 늘 자기위안 이라고 생각했지요. 내가 생산해서 내가 받아먹는 것이라고... 그런데 근래 들어서 시집 ‘쉬’가 5쇄를 찍었고 7시집 ‘배꼽’이 7쇄를 찍었어요. 누군가 나의 시를 통해 영혼의 쓸쓸함을 달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감사하고 기쁩니다. 사회와의 소통이야 말로 시인으로서 가장 큰 보람 아닐까요.
황명강 이런 질문 드려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시집 출간 수입은 어느 정도 되시는지요.
문인수 시집을 찍으면 인세의 10%가 통장에 들어와요. 몇 년 전부터는 여행비도 자급자족 됩니다. 1쇄 찍을 때마다 시집이 팔리는 것과는 상관없이 출판사에서 입금을 시켜요. 또 정부의 문예 진흥 정책이 여러 각도에서 도움을 주더군요. 정치와 내가 무관하다고 생각했는데 우수 시집, 우수 작품 선정 등의 지원이 힘이 되더라고요.
황명강 질량불변의 법칙이란 게 있지요. 시 쓰기에 있어서도 투자를 해야 얻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하신가요.
문인수 시라는 애인은 참 소가지가 못됐고 괴팍하고 이기적입니다. 내가 다섯 걸음 물러서면 그는 열 걸음 가버리고 10마디 말 걸면 겨우 1마디 대답하는, 오만방자하고 콧대 높은 애인입니다. 끝없는 관심과 애정으로 날마다 사랑을 고백해야 겨우 시의 첫줄을 불러줄까 말까 합니다. 시력과 상관없이 시의 첫줄을 얻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한 관심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시편들은 그렇게 써졌습니다. 지난 몇 개월 동시를 썼더니 최근엔 애인이 토라져서 손잡는 것을 거절당하고 있습니다. 답이 되었는지요.
황명강 선생님께서는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말씀을 가끔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오늘 선생님과의 대담이 더욱 의미가 깊은데요. 이에 대한 말씀 듣고 싶습니다.
문인수 상력을 길게 적는 시인들을 보면 속이 뒤틀렸었는데, 내가 어느새 그렇게 되었어요. 때로는 모두 적기가 민망해서 3줄 정도로 줄일 때가 많은데 김달진 문학상은 뺀 적이 없습니다.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할 즈음엔 문학상을 바란 적도 없었을 뿐더러 시 쓰는 재미만 보면서 살면 된다고 여겼었지요. 내 문학의 전기를 마련해준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그저 시와 노는 수준에 있던 나의 문학적 태도를 적극적으로 바뀌게 했으며 문단에서의 입지에도 자신감을 실어주었습니다. 김달진 문학상 수상 소식은 전류가 머리를 관통하는 듯한 충격이었고 기쁨이었습니다. 내 문학의 길에 가장 큰 사건 넷을 꼽는다면 초등학교 4학년 때 문예반에서 처음 시를 만난 일, 심상 등단, 김달진 문학상 수상, 미당 문학상 수상입니다.
황명강 근래 들어서 각 대학에 문예창작과가 늘어나고 지역마다 문학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물질 풍요의 시대에 느끼는 영혼의 빈곤 탓일까요? 문학 인구가 확산되고 있는 일련의 현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문인수 두 가지 현상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동아리나 서클 활동을 통해 성장했던 문학 청소년과 청년문단이 사라진 반면 40대 이상, 특히 여성 문학도가 문예창작수업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학의 저변 확대라는 점에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고요. 다만 문학의 입문에 있어서는 남녀노소 자격이 있되, 자신을 깊이 관조하는 진실한 문학의 길을 가야 됩니다. 문학인으로서의 진정성은 작품을 통해서만 인정받게 된다고 봅니다.
황명강 시집 ‘동강의 높은 새’의 정선행 등에서 읽히듯이 선생님은 여행을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문학인에게 있어 여행의 의미는 무엇이며 최근에 다녀오신 곳은 어디입니까.
문인수 얼마 전에는 경기도에 있는 제부도와 정선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부산의 이름 모를 바닷가를 걷기도 했지요. 우리의 일상을 살펴보면 반복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특별한 사람일지라도 그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단조로운 반복이 되지요. 글 쓰는 이는 자극을 받아야 하므로 궁합에 맞는 곳으로의 여행이 필요합니다. 외국이든 강원도 외진 산골이든 말이죠.
두꺼운 아스팔트처럼 미끄러지던 정서가 매번 여행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태어나 작품으로 연결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황명강 모습 그 자체가 시요. 시로 무장된 선생님께서도 시로부터 무장해제 받게 될 날이 올까요.
문인수 평생 시를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면에서마저 뒷모습을 보여야 할 순간이 언젠가는 오겠지요. 세월이 가면 더 늙을 것이고, 내 시에 김이 빠지듯 긴장이 풀리면 그 때는 시를 그만 쓰라고 말려 줄 후배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독자를 위해서 또는 나 자신을 위해서 무장해제를 자처해야겠지요.
황명강 선생님 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질문이라기보다는 시인으로서의 화두랄까. 선생님 심중에 둔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문인수 ‘나’라는 시인의 시간은 빈둥거림이며 그 과정은 대상을 향한 중얼거림입니다. 하지만 소모적인 빈둥거림은 금물이겠죠. 느림 속에서 놓쳐서는 안 될 순간을 움켜잡는 일, 시 ‘최첨단’에서처럼 말입니다. 인생 본연의 노래, 넓이 보다는 생의 깊고 깊은 계곡을 걸으려고 합니다. 시끄럽지 않고 그윽하게 세상 속에 흥건히 녹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고요. 귀한 지면에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달진 문학제와 아울러 문예지 ‘시애’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황명강 선생님 어느 해보다 뜨겁고 건강한 가을 건너시길 빌겠습니다.
*초대작가 문인수 시인
*대담 황명강 시인
*때 2009년 8월 30일 오후 1시
*장소 대구시 수성구 전통찻집 ‘청솔’
문인수 시인 약력
1945년 경북 성주 출생
1985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뿔' '홰치는 산' '동강의 높은 새' ‘쉬’ ‘배꼽’ 등 7권
수상경력 대구문학상, 김달진문학상, 노작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미당문학상
황명강 시인 약력
경북 경주 출생
2005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육군3사관학교 외래교수
경주신문사 편집인겸 부사장, 한국향토음악인협회 경주지회 회장
<문인수 선생의 대표시 몇 편>
배꼽
문인수
한 사내가 들어와 매일 출퇴근한다. 전에 없던 길 한가닥이 무슨 탯줄처럼 꿈틀꿈틀 길게 뽑혀나온다.
그 어떤 절망에게도 배꼽이 있구나. 그 어떤 희망에도 말 걸지 않은 세월이 부지기수다. 마당에 나뒹구는 소주병, 그 위를 뒤덮으며 폭우 지나갔다. 풀의 화염이 더 오래 지나간다. 우거진 풀을 베자 뱀허물이 여럿 나왔으나 사내는 아직 웅크린 한 채의 폐가다.
폐가는 이제 낡은 외투처럼 사내를 품는지. 밤새도록 쌈 싸먹은 뒤꼍 토란잎의 빗소리, 삽짝 정낭 지붕 위 조롱박이 시퍼렇게 시퍼런 똥자루처럼 힘껏 빠져나오는 아침, 젖은 길이 비리다.
꼭지 문인수 독거노인 저 할머니 동사무소 간다. 잔뜩 꼬부러져 달팽이 같다. 그렇게 고픈 배 접어 감추며 生을 핥는지, 참 애터지게 느리게 골목길 걸어 올라간다. 골목길 꼬불꼬불한 끝에 달랑 쪼그리고 앉은 꼭지야, 걷다가 또 쉬는데 전봇대 아래 그늘에 웬 민들레꽃 한 송이 노랗다. 바닥에, 기억의 끝이 노랗다. 젖배 곯아 노랗다. 이 년의 꼭지야 그 언제 하늘 꼭대기도 넘어 가랴 주전자 꼭다리처럼 떨어져 저, 어느 한 점 시간처럼 새 날아간다.
쉬
문인수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 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 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 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 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 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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