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강 발표칼럼 및 산문

육군3사관학교 교지 (칼럼 초대석) 2007 겨울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20. 10:53

준비된 유혹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황명강

 

 

 



자동차의 소음을 뚫고서 후두둑, 지극히 평범하고도 습관적인 발걸음을 잡아당기는 것이 있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올려다보니 헐벗었지만 당당해 보이는 은행나무가 방금 떨어진 열매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중이었다.

아름다웠던 순간들보다는 시련과 고뇌가 많았다는 듯 구린내를 풍기고 있는 몇 알의 은행, 그 단단한 눈빛의 명료함이 만족스러운지 나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부단히 바쁘게 도심의 네거리를 건너고 있는 한사람을 간단하게 묶어버리는 힘은 무엇에서  기인되었을까.

먹어서 배부른 고깃덩이도 아니고, 뭉게구름의 앞가슴 열어젖히던 붉은 입술의 과꽃도 아닌  후줄근한 은행나무에게 생각의 한 귀퉁이를 갉아 먹히기 시작했다.

 

 

은행에 들러 오늘 만기된 자동차보험료를 송금하고 샐러드용 야채와 등산화를 사야 한다는 생각 따윈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접히거나 낡아서 희미한 추억처럼, 켜켜이 드러누운 낙엽을 밟으며 어느 듯 누런 가을의 밧줄에 걸려든 발걸음은 출렁거리고 있었다.

 

 

떨어진 은행알을 줍고 있는 노부부를 지나 가방가게를 지나 이 거리와는 무관한 행인처럼,  어제쯤 집을 나선 여행객처럼 보들레르의 한 페이지를 질겅거리는 즐거움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해도 좋았다.

 

 

은행나무의 유혹!

2억 8천만 년 전부터 지구를 지켜왔다는 은행나무는 곰팡이와 벌레에 강한 관상수로 낙엽마저도 아름답다.

도심의 탁한 대기 속에서 잘 견디는 까닭에 언제부턴가 우리의 일상에 길들여져 온 나무.

 

 

봄날 두꺼운 껍질에서 돋아난 연둣빛 햇잎, 그 앙증스러움을 기억하며 시원한 그늘이 좋아 올려다보면 묻어둔 열정 뿜어내듯 매달아놓은 열매가 소낙비를 견디던 모습도 기억한다.

어느 날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래 가을을 준비한 나무의 사계가 화인으로 찍힌 열매와 낙엽의 풍경들!

 준비된 유혹은 아름답다. 상대가 스스로 유혹하고 싶도록 내버려두는 여유 또한 아름답다.

 

 

푸른 제복의 싱싱한 나무들이 거침없이 걸어다니는 육군3사관학교 교정을 떠올린다.

이 세상으로부터의 아름다운 유혹을 준비하는 곳.

긴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 곳은 어떤 세상일까 때론 궁금했었는데,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풍경은 그들이 뿜어내는 신선한 공기로 언제나 싱그러웠다.

 

 

어느 대학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최첨단 전산정보시스템을 갖춘 전산실이며 어학 관련 시스템.

미래의 고급장교가 갖추어야 할 전문지식을, 학계에서도 최고로 인정받는 교수진들로부터 교육 받고 있으니 그 자부심과 당당함이 한눈에 읽혀진다.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무술단련으로 체력에 자신감이 생기고 知的인 측면에서는 포만감을 느낄 만큼 욕심부려도 되는 생도들의 일상은 옥토에 옮겨져 가지 뻗길 준비하는 건강한 나무들임이 확실하다.

 


빈 가지만 바라보아도 황금의 언어들을 떠올리게 하는 은행나무처럼, 그렇게 쉼없이 스스로를 연마한 생도들이라면 세상은 가슴을 열고 허리끈까지 풀어 그들을 유혹하려 들 것이다.

준비된 유혹이라면 유혹 당하는 이편에서도 얼마나 즐겁고 통쾌할 것인가.

개교 40주년을 앞 둔 육군3사관학교, 곳곳의 정상에 뿌리 내린 선배들의 길을 쫓아 이 가을에도 그들은 푸른 잎을 흔들고 있다. 



 

 

 


(시인, 한국일보사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