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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직한 법조인의 삶, 부산 이규학변호사 2004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20. 19:20


 강직한 법조인의 삶, 부산 이규학변호사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흙을 사랑함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영원한 고향이라서이기 보다는 흙의 정직함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독초나 유실수를 가리는 법 없이 있는 그대로를 길러내는가 하면 무르익은 사상가가 그 속내를 쉽사리 드러내지 않듯이 흙은 기다림에도 여유를 가진다.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짐짓 인간인 듯 우월감으로 시끌벅적한 세상,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흙의 지배를 받고 있음이 너무도 명백하다.


한때 당신을 사랑했던 모교의 스승님들을 찾아서 모시고 바쁜 공직생활에도 불구하고 고향 일이라면 우선으로 하여 살아온 부산의 자랑스런 경주인 이규학변호사가 걸어오신 길은 가장 많이 흙을 닮고 있음을 그 정직함으로 하여 더 크게 느낄 수 있었다.

이규학변호사께서는 1938년 경주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유아기를 보냈고 1945년 해방과 함께 돌아왔다. 월성초등학교, 경주중고등학교, 조선대학교법과대학을 수료하였는바 지금부터 경주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설같은 이야기의 전말을 되새겨보고자 한다.

 

학창시절 공부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 연극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고 경험하기를 미루지 않았던 적극적인 학생이었다는 이규학변호사. 1954년에 열린 제 1회 서라벌예술제(신라문화제의 전신)에서는 연극 '원술랑'에서 조연인 문지기역할을 자처, 열연한 결과 최우수연기자상을 수상하여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1955년 경주중학교를 졸업하고 몇 개월의 준비기간을 거쳐 응시한 대한민국 제 10회 보통고시에서 당당히 합격한 것이었다. 부산의 경남중학교에서 3일 동안 필기 시험을 치렀는데, 응시자들이 이삼십 대의 청년들인지라 고등학교 1학년인 이규학변호사께서는 경남중학교 학생으로 오인을 받아 시험장에서 쫓겨날 뻔한 에피소드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보통고시 합격자는 국가 4급 공무원인데 경찰서장이나 경감, 을지 군수에 해당되었다고 하니 경주시내가 들썩거리고도 남을 굉장한 뉴스거리였다고 주위 분들은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한 2년 후인 1961년 10월 제 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하는 더 큰 영광을 얻으니 개인의 기쁨이기에 앞서 또 한번 모든 경주인의 자랑거리였다고 전해진다.

 

공직생활은 1963년 육군 제 3군단 보통군법회의 심판부장을 시작으로 육군 군수기지사령부 법무부 검찰부장, 대전지방경찰청 검사, 법무부 법무실 검사,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춘천지방검찰청 강릉지청 검사, 대구지방검찰청 영덕지청 지청장, 부산지방검찰청 검사,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지청장을 역임했다. 1

 

982년 11월 변호사 개업을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이규학변호사 사무실은 법원과 검찰청 맞은편인 부산 연제구 거제1동 협성법조빌딩 604호에 있다. 나이는 그분을 비켜가고 있었다. 주어진 업무며 동창회나 각 향우회에서는 여전히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열정으로 선두에 서서 지휘하고 있으며 거침없는 정직함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고 있다.

 

일반 기업은 모두 열거할 수도 없거니와 유수 공기업과 부산시 교육청, 한국전력, 수협, 동구청의 고문변호사를 맡고 있지만 이규학변호사께서는 어렵고 억울한 서민들의 설움도 결코 가벼이 하지 않는다. 일본에서 돌아와 보낸 유년시절의 어려웠던 때를 기억에서 지우지 않고 삶의 거울로 삼아 살아 오셨다니 그 또한 본받을 일이 아닌가.

 

자식들을 힘들게 뒷바라지하신 어머니가 그리워 사모곡을 지었다는 이규학변호사. 어머님의 바램대로 모든 자손들이 훌륭하게 오순도순 잘 살아가고 있다고 전하신다. 경주중고등학교 부산동창회와 수봉산우회, 계림회 등 30년 넘게 다져온 부산에서의 고향사랑 이야기는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하며 가내의 평온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