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시학- 2010년 봄호에 발표
물의 혀 (외 1편)
황명강
얼음의 몸 위로 김이 오른다
꺼칠한 살결 껴안는 고지식한 바람만 기어다닐 뿐,
메기 씨 붕어 씨 개구리 양
연못의 주민들은 보이지 않는다 날카롭게 자란
얼음의 이빨 사이엔 빙그레우유 곽이 미동 없이 앉아 있다
침묵으로 항변하는 저마다의 길 앞에
지난여름에 보았던 것들이 오류였다고,
물음표처럼 쪼그라든 마른 풀잎이
남극의 별을 가진 적 있다고 일러주는 이 없다
물이 혀 내밀어 얼음을 핥는다
기울어진 문장을 아이러니가 추켜세우듯
겨우내 굳어가는 물고기들의 들숨과 날숨
푸른 멍이 투명해지도록 핥아댄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저 혀들이 꿈이고 희망인, 얼음 아래 숨어 떨고 있을
보이지 않는 어린 눈빛들이 아프다
숨구멍 열어 줄 혀마저 없던 지난 시절의 빙하,
그곳 떠돌던 지느러미는 지금쯤 바람이 됐을까
혀가 움직일 때마다 얼음의 중심이 이동한다
이 긍정은 진실이나
우주 어디에도 영원한 진실은 없다
반지
황명강
스물에 잃어버렸던 반지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맵고 달고 쓴 시간들에 매달려 있던 낡은 전선줄과 반짝이던 군화 소리까지
석양을 흔들며 왔다
비누거품이 사라진 냇가 어디쯤 그가 있으리라 가끔 돌아보기도 했는데,
불고기집 매운 연기 머뭇거리는 창가
하현처럼 기울어진 술잔 받으며 엉뚱하게도 난 자정을 밀어내고 있는 달의 반대편을 생각했다
주름이 따스하던 모과의 음성과 새벽 산책로 느닷없이 막아서던 거미의 길,
은밀하게 감춰둔 야생의 우연들까지 혈관의 정교한 형식을 빌려 헤엄쳐왔다
빨간마후라의 하늘 갈고 문질러 푸른빛 감돌던 유리반지
해안에 떨어진 유성과 모래알의 감응을 알지 못하듯
둥근 경계 희미하도록 커져 버린 한때의 열정과 사랑
세상의 모든 것은 자라면서 지워지는가
별빛을 쫓던 사과나무의 꿈, 절정의 벚꽃이 숨긴 비애와 27층 빌딩에
난분분 피고 지는 엘리베이터
질주하는 경부선 고속도로를 손가락에 끼웠다 뺐다 내려놓는다
매운 바람 술렁이는 오늘 밤
유리반지 푸른 문양을 추억하며 둥근 그 위를 걷는다
—《시와 시학》 2010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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