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BN경북방송자료

2009 경주시민상 문화부문 수상한 서예가 정수암 선생 인터뷰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9. 11. 20. 20:15

 최종편집 : 2009-11-20 오전 11:55:56

지방자치 의원동정 인물 행사 관광영상 사회 돌발영상

전체기사

커뮤니티

역사사진

시민게시판

자유게시판

야생화사진

공지사항

문화재동영상

생활정보

맛있는집

펜션&호텔

여행&레저

축제&행사

상가소식

교통정보

뉴스 > 인터뷰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2009 경주시민상 문화부문 수상자 정수암 선생

묵향처럼 담백하고 묵향처럼 그윽하게 번지는 삶

 

 

2009년 11월 20일(금) 11:55 [경주신문]

 

↑↑ 2009 경주시민상 문화부분 수상한 정수암 선생

ⓒ 경주신문



“누구라도 해야 한다면 내가 하자, 언제라도 해야 한다면 지금하자, 어떻게라도 해야 한다면 잘하자” 선생은 생의 지표로 삼아온 위의 몇 구절을 수상 소감에서 밝혔다.
학교 교육현장에서는 훌륭한 교육자로, 사회에서는 성실한 예술인으로 구김 없고 폭넓게 활동해 온 저력이 깊은 심중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이다.

어린이를 만나면 아이처럼 순수해지고 청년을 대할라치면 말투에서 푸른 잎사귀가 출렁이듯 힘차다. 그러나 어느 순간 노인과 마주하면 선생은 그의 손주나 되듯 고분고분한 아이처럼 바뀌는데, 얼마나 담백하고 흰 백지 같아야 그처럼 될 수 있을지 추측으로나 가늠할 뿐이다. ‘덕봉 정수암 선생’ 하면 아련하게 일어서는 묵향과 흰 백지가 떠오른다. 누군가에게 이런 느낌으로 유추되기란 실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지인들이 전해주는 선생의 또 다른 좌우명을 들어본다.
“모르면 알려고 노력하자, 알았으면 그 지식을 공유하자, 그리고는 반드시 실천하자.” 이 3단계는 정수암 선생이 일상생활에서 꼭 지키고 있으며 이처럼 유익한 바이러스는 퍼뜨려야 한다며 주변에 전염시킨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모르는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할 터이며, 그 지식을 실천하는 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의 작품세계는 헤아릴 수가 없다. 내일은 오늘 걸어간 길만큼 더 깊어져 있을 것이므로...
.

↑↑ 서라벌초등학교 복도에 걸린 정수암 선생의 글

ⓒ 경주신문



황룡사지의 목탑지 앞쪽에 가면 당시 탑을 세웠던 백제인 아비지를 기리는 내용의 기념비가 있다. 경주박물관 성덕대왕신종을 찾아 그 우측을 살펴보면 종을 조성한 박대나마를 기리는 기념비를 만난다. 건천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박목월 선생의 시비 ‘윤사월’, 경주도서관 등등 경주를 비롯한 전국 3백여 곳에서 우리는 정수암 선생이 쓴 비문이나 현판을 보게 된다. 선생이 서예글씨를 제공한 것은 무엇을 남기려 함이 아니라 누구라도 해야 한다면 내가 한다는 봉사에서임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다.

정수암 선생은 경주시 건천읍 신평리(수룡) 1765번지에서 아버지 정홍납 선생과 어머니 이호술 여사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형제들이 어릴 때 모두 저 세상으로 가고 혼자만 남게 되자 모친은 아들의 이름을 개명했다. 목숨 壽, 바위 岩으로(목숨이 바위처럼 오래 살라고).
부친은 선생이 7살 때 돌아가시고, 모친은 청상의 과부로 어린 아들 하나 바라보며 가난 속에서 살았다.

건천초등학교, 무산중학교를 졸업하고 문화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대학에 갈 형편이 되지 못함을 스스로 알고 문화고등학교 농업과를 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해 대학입학 예비고사가 처음 시작되어 연습 삼아 치른 시험에 합격이 되자.(농업과 40명 중 합격자 5명) 고민 끝에 돈 적게 드는 교육대학을 지망해 합격했다. 그러나 2년간 계속 진 빚으로 모친은 가마니를 쳐서 생활비 마련했고 선생은 어렵게 학교를 마쳤다.

1971년 첫 부임지는 안동 대곡초등학교였다. 발령을 받고 모친과 함께 그곳에서 생활했는데 2년간 진 빚을 갚기 위해 마을금고에 월급 모두를 적립했으나 금고의 부도로 그 적금이 모두 날아갔다. 그로 인해 병을 얻은 모친은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75년 경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박양춘 여사와 결혼하고 2남1녀를 두면서 생활이 나아졌지만 모친은 극구 성동시장에서 반찬 장사를 하셨고 6년간 병으로 계시다 66세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떠나보낸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선생의 말끝마다 서려있음이 느껴진다. 그 후 선생은 경주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과에서 금석문을 전공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88년)

↑↑ 정수암 선생의 글, 글씨.

ⓒ 경주신문



평소 글씨 쓰기를 좋아하던 정수암 선생은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특별한 영역을 익혀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75년부터 서예와 한문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가 깊어지면서 선생은 서예공부를 위해서 서울, 대전 등 먼 길을 마다않고 다녔다.

어려운 가정형편이었으므로 어머니와 부인의 도움이 매우 컸음을 회상한다. 매달 서울에 갈 때면 이웃집에 돈을 빌려 여비를 만들어야 했지만 ‘불광(不狂)이면 불급(不及)이라’ 즉,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뜻으로 선생이 즐겨 쓰는 말이라는데. 퇴근 후와 휴일에는 서실에서 서예공부를 하고 학교에서는 최선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사랑하는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경주 서라벌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인 선생은 복도와 현관 등을 겔러리처럼 품격 있게 가꾸고 있다. 교정을 뛰노는 아이들을 사랑스런 눈으로 지켜보는 정수암 선생, 요즘도 방과 후엔 전교생에게 서예를 지도하신다. 안동 대곡, 경주 덕동, 서라벌, 황성, 월성, 영일 산서, 왕산, 월성, 서라벌, 괘릉, 동천초등학교에서 평교사로 울진 기성, 경주 오릉, 계림초등학교에서 교감으로 계셨고 안강북부초등학교를 거쳐 서라벌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스스로에게 엄격하지만 항상 주위를 유쾌하게 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선생에겐 어린 학생들로부터 동료, 선배에 이르기까지 친구가 많다. 안동 대곡초등학교 재임 시에 화랑 야간 중학교를 개설해 3년간 운영한 일, 경주 왕산, 영일 산서에서는 방과 후 학교 활동으로 전교생을 지도한 일, 서예용구 및 기타 재료비 일체를 학생들에게 부담시키지 않고 개인 및 독지가 지원하게 했다. 선생의 이러한 마음들은 KBS 대구방송, 중앙방송 및 포항 MBC 등을 통해 알려졌고 청와대로부터 모범공무원 포상을 받게 된다. 상이 그 아름다운 마음을 대신할 수 없을 터이나 선생은 늘 낮은 자리에서 도리어 감사함을 전한다.

정수암 선생은 경주를 사랑한다. 경주의 문화재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경주사람을 사랑한다. 후세들에게 문화유산이 될 오늘의 생활상을 제대로 남겨야한다는데 뜻을 세운 선생은 2000년부터 도시환경개선을 위한 간판 글씨 무료 써주기, 1995년부터 일반 가정에 가훈 보급을 위해 신라문화제, 술과 떡 잔치, 세계문화엑스포 등 행사 때는 현장에서 직접 가훈을 써서 1천여 가정에 보급했다.

1995년 이후 현재까지 경주의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전통서예문화보급과 청소년 인성 함양을 위해 경주학생서예실기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2007년엔 경주서예가연합회 창립했고 올해는 다문화 자녀 돕기 ‘2009. 5월 단오 부채작품전’을 열어 다문화가정에 성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얼마 전 경주실내체육관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린 ‘고운서예전국휘호대전’은 선생이 회장을 맡고 있는 경주서예가연합회가 주관한 행사로 전국 규모의 대회로 좋은 작품들을 냈다. 내년부터는 고운선생 학술발표회 및 부대행사를 함께 열어 또 다른 문화의 장을 열겠다는 의지를 밝히신다.

선생은 91년 제 1회 개인전과 2001년 제 2회 개인전을 불우청소년 돕기로 열어 각각 100만원, 400만원(수입금 전액)을 소년소녀 가정 돕기에 기탁했다. 공직을 마무리할 2112년 초에 3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선생은 95년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전, 2005년~2008년 경기도서예대전 초대작가전, 2009년 제주도서예대전초대작가전에 초대돼 출품했고 국제난정필회 작가전 10회(한국, 중국), 한, 중 국제교류전 5회 출품, 국내외 단체전(독일, 일본) 30여회 참가하는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한민국서예대전(국전) 초대작가이며 심사위원(3회), 한국서예협회경상북도지회장 역임(6년), 경상북도서예대전운영위원장 역임, 신라미술대전 초대, 운영, 심사 역임, 전국 시.도 서예대전 심사, 경주서예가연합회장, 경주문화원부설 향토문화연구소 소장 역임 현 연구위원, 경주시사 편집위원 등 선생의 걸어온 내력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근래 들어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가 있으니 올해 창립한 ‘경주금석목문연구회’이다. 경주의 뜻있는 분들의 마음을 모아 경주에 산재해 있는 ‘금석목문’을 연구하고 정리하기 위한 단체로 매월 1회 현장 답사를 통해 탁본과 원석 보존을 위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고 전한다.

↑↑ 서예가 정수암 선생

ⓒ 경주신문



정수암 선생은 “인생은 퇴직할 때까지를 1모작이라 하고, 퇴직 후의 10년, 20년까지를 2모작 경영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그 후의 인생 설계를 3모작이라 하여 90세 까지를 경영하기 위한 설계가 필요합니다. 3년 남은 교직생활에서 고객(학생)감동이라는 소신으로 학생교육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아울러 사회활동으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는 마음으로 봉사하고, 배려하는 삶으로 봉사할 것입니다. 퇴직 후에는 박사과정으로 문화재 영역을 더 공부할 것을 계획해보면서 ‘경주시민상’이라는 큰상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라며 심중을 밝히신다. 다시 한 번 수상을 축하드리며 덕봉 정수암 선생의 향기로운 묵향이 더욱 번져가길 기해한다.

황명강 기자  violetdy@naver.com
“”
- Copyrights ⓒ경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