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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김성복세무소 소장 김성복선생 / 2003년 10월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20. 17:56


내면의 단정함으로 존경받는 분.



파란 하늘에 몸 누이고 편하게 익어 가는 감이 때로 바람을 흔드는 계절이다.
스쳐간 햇살과 구름과 바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 기억들의 힘으로 감은 가지를 붙잡고 또 다른 내일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리라.

가을 햇살이 골고루 뿌려지는 시각, 두류공원이 건너다 보이는 대구시 남구 대명4동 김 성복 세무 회계사무소에서 평생 스스로를 채찍하며 곧고 푸르게 살아오신 靑山 김 성복선생을 만났다.

 


1932년 경주시 양북면 어일리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출생,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선생. 경주시내와 양북을 가로막은 추령을 넘어 경주사범학교(지금의 경주중학교)에 다닌 일은 요즈음 외국으로 유학 가는 것보다 대단한 사건이었다.
선생의 꿈은 어릴 적부터 훌륭한 교직자가 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경주사범을 졸업한 18세의 나이로 교단에 서게 되었으나 나라는 전쟁으로 휘청거렸고 군장교로 입대해 5년 세월을 몸소 소용돌이 속에 던지게 된다.

 


제대 후 다시 교직을 원하였지만 1961년 동대구세무서로 발령이 났다. 그후 선생의 성품을 반영하듯 청렴한 공직자로서 인정을 받으며 중요한 요직을 거쳐 경북 의성 세무서장을 역임하였고 1987년 퇴임, 김 성복 회계 세무사 사무실을 열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고희를 넘었지만 김 성복선생의 모습은 내면의 단정함에 의해서인지 그 누구보다 꼿꼿했다.

 


한 그루의 나무에도 한 마디의 말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주위 분들의 선생을 향한 존경의 말들이 지나온 행적을 대신하기도 하는데, 바쁜 세무사업무 중에도 대구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1992년 5년 반만에 “한국 租稅 收入構造의 변동과 推定”이라는 논문으로 어렵다는 경제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또한 올해 4월에는 “추령별곡”이라는 제목의 수필집을 내어 주위 분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경제학박사와 문학이라! 그러나 선생의 수필집을 읽다보면 이름난 어떤 문인보다도 뛰어난 감성과 사랑을 지닌 분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수필집 절반 이상의 소재는 경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고향에 흐르던 물소리, 고향 사람들, 지난 세월 속의 황성공원. 무르익지 못한 나의 고향사랑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사무실을 들어섰을 때 선생의 손에는 또 다른 한 묶음의 원고가 들려 있었는데 곧이어 출간될 선생의 시집 “먼길” 이라고 했다.
먼길을 왔다는 의미로 정한 제목이라며 “만약 세무공무원이 되지 않고 교직생활을 했더라면 지금은 시인이 되어있지 않았겠나” 하셨지만 이미 그분은 시인이었다.

 


대구에서 가장 활발한 향우회 대종회(현, 정 연걸회장)의 명예회장인 선생은 1991년 대종회이전 양북향우회를 몸소 이끌어 왔고 지금도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국세청에 있을 무렵 자연스럽게 고향분들을 만나게 된 것이 그 계기였다고 말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닐 것이다.

 


교직의 길을 가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하는 선생, 그러나 진실한 삶의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 참된 스승상 이었다.
권옥순여사와의 사이에 장남 김 인구씨를 포함 4남매를 두었고 예쁜 손주 손녀도 보셨다고 한다.
추령 너머 먼길을 걸어갔지만 마음 한 자락 추령에 걸쳐놓았던 김 성복선생. 언제나 고향을 잊지 않음에 감사드리며 그 정신을 모든 경주인의 가슴에 새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