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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중심을 걸어 온 김규재 회장 2003년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20. 17:36


역사의 중심을 걸어 온 김규재 회장

 (대구시 동구청장, 경북안동시장, 대구광역시 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역임)

 

 



절기는 이미 입추를 들어서서 가을로 가고 있는데, 계절의 마무리가 몹시도 어려운 듯 그만 오시라는 비가 심심풀이처럼 내리고 있다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경주의 세계문화엑스포,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중에는 날씨 좋은 것이 큰 부조가 되겠기에 저절로 노심초사해진다.


세계적인 행사가 열리고 있는 시점에 언제나 역사의 중심에 서서 한 시대를 이끌어온 자랑스런 경주인를 만났다. 내무부 사무장, 대구시 감사실장 , 대구시 동구청장, 요직을 거쳐 경북안동시장, 대구광역시 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등을 역임하신 김 규재 회장님이 그분이다.


김 규재 회장님은 1934년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에서 출생, 그곳에서 성장하였으며 연산군조에 대사헌 대사간을 지낸, 직언과 청백리로 알려진 보백당 김 휘 선생님의 후손으로서 어릴 때부터 뜻을 세워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었을 테지만 그것을 현실화시키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노력과 인품 또한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물며 암울했던 시대에 태어나 혼란한 역사를 거쳐온 성장기임에랴.


김 회장의 공직생활은 1960년 대구시 최초의 공채1기로 시작된다. 그후 대구시의 여러 부서에서 근무하다가1976년 서울로 향한다. 내무부의 사무장을 지내다 산림청으로 옮겼으며 1982년 다시 대구로 돌아와 대구시 감사실장에 오른 후 시의 요직을 거쳤고 대구시 동구청장과 경북 안동시장 재임동안 서민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경제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동참하는 시장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특히 중앙으로부터 400억 규모의 국비를 지원 받아내어 오염되어있던 안동의 젖줄인 낙동강을 살려내어 안동시의 면면을 바꾸어놓게 된 공적은 두고두고 안동시민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고 전해진다. 공직시절 그 공로로 ‘녹조근정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대구 상공인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1994년 대구시 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으로 추대되어 3번이나 연임을 하고 2001년 현직에서 은퇴하기까지 작고 큰 일을 가리지 않고 대구시 상공인들의 힘이 되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IMF 이후 도산위기에 처한 (주)우방을 구하기 위해서 우방살리기 시민운동을 실시, 몸소 회장직을 맡아 100만명을 훨씬 초과하는 서명운동을 벌여 대통령까지 감동시킨 일이 있었다. 덕분에 각계의 도움을 받아 (주)우방은 현재 법정관리 상태이며 재기를 다짐하는 중이라고 한다.


또한 대구의 자랑이기도한 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되살리기 위해 결집된 국채보상운동 기념사업회의 부회장을 맡아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중심에 서 있다. 지금까지 김 규재회장님의 삶이 그러했듯이 자신의 안위보다는 남을 위해서 보낸 시간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았다.


“돌아보니 참으로 빠르게 가버렸지만 보람있는 세월이었다.”는 말씀에 이어 자서전을 낼 의향을 물었는데, 훌륭한 생애를 마치면서 족적을 남기지 않고 없애버렸다는 “보백당 선조님을 생각하면 입을 다물고 싶다.”라며 조용히 웃으셨다.


어느 청년보다도 모든 면에 의욕과 실행을 함께 하고 있는 그분은 재 대구 외동향우회 회장, 남석회 회장, 재 대구 문화중고등학교 동창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경주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씀이 있었다. 외동읍 구어리에 동생 정봉씨가 있으며 선산을 찾을 때나 기회 때마다 경주를 자주 찾는다고 한다.

 

긴 시간을 함께 해온 부인 최 영희씨와의 사이에 효진, 현수, 광희, 민수 4남매를 두어 가내가 두루 다복함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잘 걸어와 열매를 거두려는 거목 앞에서면 그 나무를 한번 더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김 규재 회장님 개인의 삶이기도 하지만 경주를 빛내준 그분께 감사드리며,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