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춘추 - 여유 있는 거리에 서고 싶은가
어제 흘러온 길을 기억할 시간도 없이 강물은 바다로만 나아가는데 바다에 이른 강물은 그때부터는 여유 만만하다. 하염없이 섞이며 비가 되었다가 다시 파도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물처럼 거침없이 살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하겠지만 눈만 뜨면 만나는 풍경은, 어디로든 앞다투어 달려가려는 자동차들과 소음으로 나부끼는 거리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속해있는 이 사회는 분명 사람의 마을인데, 언뜻 돌아보면 컴퓨터의 마을, 자동차의 마을이 되어버렸다. 동네마다 비집고 앉은 PC 방에서는 초등학생들이 컴퓨터오락 즐기느라 식사 때를 놓치기 일쑤라고 한다.
사물을 분간하기 시작하는 아기들의 눈에도 바쁘게 달려가는 자동차의 행렬이 각인 되기 시작하고 그들이 자라 어른이 되면 얼마나 더 빠른 속력으로 달려갈까 걱정이 앞선다.
아침에 눈비비고 일어나 사립문 앞에 서면 입다문 호박꽃들, 짧은 여름밤이 아쉽더라는 소곤거림 같은 것을 들어줄 여유가 있을는지. 호박 몇 포기 심을 마음의 자리는 남아 있을는지.
방송국이나 각종 문화센터에서는 취미강좌를 열고 삶의 질을 높이는데 앞장서 나가려고 애쓰고 있다.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서 남들 안 가진 것 하나 더 가지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진실로 자신의 뜰을 가꾸는 이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느 길목 낯선 담벼락이라도 기대어 서서 가끔 느림을 배웠으면 좋겠다.
이 글을 쓰는 사람도 누구보다 바쁜 시간 속에 살고 있다. 너무 열심히 뛰어다니다 입안까지 말라버릴 때, 가만가만 가슴 속 책장을 더듬으면 바람이 일게하고 이슬 내리게 하던 어느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할까 한다.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 '아득하면 되리라' (박재삼시인)- 앞부분.
일회용이 난무하는 요즈음, 사랑하는 사람과의 거리도 아득하면 되리라는 이 구절은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세상의 중심은 우리들 자신에게 있음이니 여유 있는 거리에 서고 싶은 사람은 하루에 한 시간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그날 바람이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지도 살펴보고 시집 한 두 권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낯모르는 사람에게 나누어준들.....
황명강〈시인회의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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