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민칼럼 3003년 1월 '곡선과 직선에 대한 명상'
어스름 내릴 때쯤의 거리에서, 어느 한 순간 일제히 가로등불 켜지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불과 40여년 전 쯤 달빛 한 줄기 의지하여 길 떠나던 나그네는 세월 저 너머 전설 속을 걸어가고 있다. 어둠을 비켜가는 도심의 밤은, 초승달이든 반달이든 그림 속 배경처럼 떠 있다가 사라지고, 결코 곡선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듯 바쁘게 달려가는 자동차의 불빛 바라보며 열닷세를 두드리고 구부려서 완성된 보름달조차 홀로 조용할 뿐이다.
산모롱이 돌아 개울 길 걷다보면 촉촉이 젖은 제비꽃의 지저귐과도 만나던 구부러진 시골길은 사람들로 부터 멀어지고 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오해하던 마음이 몇 개의 모퉁이 돌면서 여과되어 사라지던 경험을 우리는 가끔 할 때가 있었다. 동전만 넣으면 커피와 즉석라면이 쏟아지고 아기를 위해서 맑은 물 나오도록 기저귀를 헹구는 어머니들을 쉽게 만날 수 없는 21c를 살면서 곡선 예찬을 한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일까?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험하기로 이름 떨치던 고개들이 힘없이 주저앉은 것을 더러 본다. 최첨단 공법이 동원된 도로는 아무리 험한 산도 거침없이 뚫고 지나간다. 구름에 잠긴 이화령에서 한 나절 머물러가는 여유로움을 직선이 비웃으며 내달리고 있다.
빨리 만날 수는 있겠지만 빨리 돌아서기 위해 굽은 허리를 잘라 길이를 줄여가는 오늘날 현대인이 추구하는 길....
우리가 살고 있는 땅 경주는 어떤 느낌의 도시일까. 정체성이 언뜻언뜻 보이기는 하지만 새롭게 변신하려는 꿈틀거림이 있고 이웃끼리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는 여유가 있다. 천년을 이어온 문화 속에서 또 다른 문화들을 피워내고 있으니, 1/3의 직선과 2/3의 곡선이 적절하게 혼합되어 있는 곳. 아마도 나라 안에서는 가장 완만한 곡선의 풍성함을 누리는 곳이 아닐 런지. 떨어진 휴지가 있으면 먼저 나서서 줍고, 낯선 사람이 스쳐가도 미소 띠우는 아름다운 사람으로 살아 볼 일이다.
화롯불에 익어가는 군밤이 없은들 어떠리. 바람도 귀를 막는 겨울밤엔 휴대전화기를 끄고 그리운 이에게 편지를 써보자. 소중한 벗의 안부를 전화 한 통화로 묻기에는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잿불에 묻어둔 불씨가 다시 활활 불꽃을 피우듯 우리의 잃어버린 시간들이 뜨거워질 것이다.
황명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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