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강 발표칼럼 및 산문

2003년 대구신문 칼럼 '문화춘추'-부자된 마음으로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18. 16:29

<문화> 문화춘추 - 부자 된 마음으로

 

 


출발은 늘 무엇인가의 끝에서 시작되지만 사람들은 보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서 아쉬워하고 술렁거린다.

100 킬로미터 이상을 질주하던 자동차도 어디에선가 휴식하고 또다시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 갈 것이다. 여전히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떠오르는 해였지만 다 비워낸 가슴으로 바라보는 태양은 더욱 붉고 크게 안겨오고 있었다.

그림속의 꽃에 향기가 날 것 같은 새 달력을 벽에 걸다가 나에게 주어진 365일이란 날들을 헤아리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운전석에 앉아서 스스로 나아가야 할 나만의 시간들. 어떤 사람들을, 어떤 나무들을, 어떤 꽃잎들을 만나게 될지 넉넉하고 부자 가된 마음으로 기대해 본다.

철이든 이후로 새해를 맞으며 오늘처럼 편안해 본 적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버리지 못한 욕심 때문에 세상의 일들에 원망이 많았었다.

주어진 현실보다는 과거를 뒤돌아보며 괴로워했고 사루비아꽃이 붉어와도 예쁜 것을 느끼기 전에 왜 그리도 단전 깊은 곳까지 아파 오던지……. 취하는 것도 버리는 것도 종이보다 얇은 마음의 앞과 뒤였는데, 수십 년을 한쪽만 부여잡고 그것이 전부인 양 알고 살았으니 비우는 일 쉽지만은 않으리.

2002년 한해가 저무는 날, 해돋이 자동차 행렬에 함께 떠밀리며 경주로 향했다.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신 법륜스님을 멀리서라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가까운 우리 이웃에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이 많은데 왜 하필 얼굴빛깔도 언어도 다른 이국땅 인도나 우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북한 어린이 돕기를 해 오셨는지 궁금증도 있었다.

실제로 본 스님은 사진보다 더욱 부드럽고 인간미 넘치는 분이셨다.

우리 인간이 넘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경계에 대해서 웃음 띤 모습으로 강의를 하시었다. 같은 동포이면서 같은 인간이면서 경계 밖에 있다고 돕지 않는다는 일은 있을 수 없지 않느냐는 말씀으로

세상 살아가는 모든 이치가 한순간에 깨우쳐져 왔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길의 방향이 조금씩 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이념과 욕심에 앞서 “사람으로 돌아가자”는 스님의 특강으로 목말랐던 긴 여정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달력 앞에서 다가올 많은 날들을 어떤 빛깔과 형상으로 빚어낼까 상상하며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다.

올해도 함께 항해를 떠날 모든 사람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하루하루 나아가기를 기도하면서.

 



황명강<시인회의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