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강 발표칼럼 및 산문

2002년 대구신문 칼럼 '문화춘추' - 문명에 빼앗긴 시간들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17. 22:49


<문화> 문화춘추 - 문명에 빼앗긴 시간들



남들이 가고 있는 길을 휩싸여 따라가다 보면 잘 왔다 싶을 때도 많지만 때론 이게 아닌데 하는 경우도 있다. 나름대로의 지식을 쌓으며 조금도 밑지지 않으려는 듯 고급 승용차를 사들이고 잠자는 시간마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는 도시인의 삶.

오십이 지난 올해 가을에서야 거리에 굴러가는 낙엽을 만날 수 있었다는 어떤 분의 말이 낯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생활 또한 그러하다. 가장 소중한 자신과의 약속은 수도 없이 어기면서 타인이 던지는 끈에 매달려 이리저리 휘둘리며 걷고 있지 않은가! 집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잔잔하게 어깨를 적시던 슈베르트나 가곡의 음률은 아득히 멀어지고 텔레비전 채널이 여백의 시간을 지배한다.

며칠만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는 드라마에 몰입해 책을 놓아버린 사람들,

오늘도 누군가 절실하게 토해낸 메시지들은 읽혀지지 않은 채 두께를 더해 갈 것이다. 겉모양의 화려함을 과시하고 또한 서로 그렇게 이끌려 살고 있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이년 전 우포늪 갈대 숲 사이에서 걸러져 나온 맑은 물빛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가끔 관찰하듯 바라볼라치면 그는 무엇보다 자신과의 약속에 철저했고 그를 낳게 한 돌멩이 하나까지도 소중히 어루만지며 살아가고 있었다. 좀 더 흥미있는 프로그램은 없을까 하며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대다가는 몸만 살아 움직이는 나를 발견했을 때 문득 그 사람이 떠올려진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고 말하던 친구. 아이들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착하고 예쁘게 잘 자라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사 때는 거실 한가운데 자리로 점점 옮겨 앉다가 아이들 방까지 차지하는 우리 모두가 가장 선호하는 텔레비전. 갑자기 그 자리를 뺏을 수 없다면 일주일에 이틀쯤 꺼두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갈꽃 꺾어다 공부방을 장식하는 일 등이 너무 먼 곳의 이야기인 우리 아이들에게 손잡고 가까운 공원 한 바퀴 돌아오는 추억이라도 쥐어 주었으면 한다.

오늘 저녁에는 네모난 화면을 벗어나 어느 시인의 시집 한 권 꺼내 읽으며 늦은 가을 속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황명강〈시인회의 상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