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夜九渡河記(일야구도하기)
연암 박지원 -한문수필-
나의 거처(居處)는 산중(山中)에 있었는데, 바로 문 앞에 큰 시내가 있었다.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마냥 전차(戰車)와 기마(騎馬), 대포와 북 소리를 듣게 되어, 그것이 이미 귀에 젖어 버렸다.
나는 옛날에, 문을 닫고 누운 채, 그 소리들을 구분해 본 적이 있었다. 깊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바람 같은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청아(淸雅)한 까닭이며,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분노(憤怒)한 까닭이며, 뭇 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것은 듣는 사람이 교만(驕慢)한 까닭이며, 수많은 대피리가 슬피 우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운치 있는 성격인 까닭이고, 거문고가 궁우(宮羽)에 맞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슬픈 까닭이고, 종이창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는 듣는 사람이 의심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모든 소리는 올바른 소리가 아니라 다만 자기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에 따라 귀에 들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어제 하룻밤 사이에 한 강(江)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
강은 새외(塞外)로부터 나와서 장성(長城)을 뚫고 유하, 황하, 진천 등의 여러 줄기와 어울려 밀운성 밑을 지나 백하가 되었다.
내가 어제 두 번째 배로 백하를 건넜는데 이것은 바로 이 강의 하류였다.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무렵, 바야흐로 한여름의 뙤약볕 밑을 지척지척 걸었는데, 홀연히 큰 강이 앞을 가로막아 붉은 물결이 산 같이 일어나서 끝을 볼 수 없었다. 아마 천 리 밖에서 폭우로 홍수가 났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을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보고 있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묵도(默禱)를 올리고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랜 뒤에야 비로소 알았지만, 그 때 내 생각은 틀린 생각이었다. 물을 건너는 사람들이 탕탕(蕩蕩)히 돌아 흐르는 물을 보면, 굼실거리고 으르렁거리는 물결에 몸이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아서 갑자기 현기(眩氣)가 일면서 물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그 얼굴을 젖힌 것은 하늘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숫제 물을 피해 보고자 함이었다. 사실, 어느 겨를에 그 잠깐 동안의 목숨이 기도할 수 있으랴!
그건 그렇고, 그 위험이 이와 같은데도, 이상스럽게 물이 성나 울어 대진 않았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은 요동의 들이 넓고 평평해서 물이 크게 성나 울어 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물을 잘 알지 못하는 까닭에서 나온 오해인 것이다. 요하가 어찌하여 울지 않았을 것인가? 그건 밤에 건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낮에는 눈으로 물을 볼 수 있으므로 그 위험한 곳을 보고 있는 눈에만 온 정신이 팔려 오히려 눈이 있는 것을 걱정해야만 할 판에, 무슨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젠 전과는 반대로 밤중에 물을 건너니, 눈엔 위험한 광경이 보이지 않고, 오직 귀로만 위험한 느낌이 쏠려, 귀로 듣는 것이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아,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도다. 마음을 잠잠하게 하는 자와 귀와 눈이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밝아져서 큰 병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나를 시중해 주던 마부(馬夫)가 말한테 발을 밟혔기 때문에, 그를 뒷수레에 실어 놓고, 이젠 내 손수 고삐를 붙들고 강 위에 떠 안장(鞍裝) 위에 무릎을 구부리고 발을 모두어 앉았는데, 한 번 말에서 떨어지면 곧 물인 것이다. 거기로 떨어지는 경우에는 물로 땅을 삼고, 물로 옷을 삼고, 물로 몸을 삼고, 물로 성정(性情)을 삼을 것이리라. 이러한 마음의 판단이 한 번 내려지자, 내 귓속에서는 강물 소리가 마침 그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려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는데도 두려움이 없고 태연할 수 있었다. 마치 방 안의 의자 위에서 좌와(坐臥)하고 기거하는 것 같았다.
옛적에 우(禹)가 강을 건너는데, 누런 용이 배를 등으로 쳐서 지극히 위험했다 한다. 그러나 생사의 판단이 일단 마음속에 정해지자, 용이거나 지렁이거나 혹은 그것이 크거나 작거나 간에 아무런 관계될 바가 없었다 한다.
소리와 빛은 모두 외물(外物)이다. 이 외물이 항상 사람의 이목(耳目)에 누가 되어 보고 듣는 기능을 마비시켜 버린다. 그것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강물보다 훨씬 더 험하고 위태한 인생의 길을 건너갈 적에 보고 듣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병이 될 것인가?
나는 또 나의 산중으로 돌아가 앞내의 물소리를 다시 들으면서 이것을 경험해 볼 것이려니와 몸 가지는 데 교묘(巧妙)하고 스스로 총명(聰明)한 것을 자신하는 자에게 이를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다.
출전 : <열하일기(熱河日記)> 중에서 산장잡기(山莊雜記)
***연암이 하룻밤에 아홉 번의 강을 건너면서 눈과 귀를 통해 느끼는 공포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현상에 따르는 자신의 감정과 절연을 해야 한다는 내용을 쓴 글. 즉 이목(耳目)으로 보고 듣는 것이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예리한 관찰력으로 쓴 좋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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