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년 ~ 1805년)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이다. 조선의 문신이며 실학파 학자로 당시 청나라의 우수한 점은 배워야 하며 상공업을 중요히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한 북학파. 영정시대. 저서로는 유명한 ‘열하일기’와 소설 ‘양반전’, ‘허생전’ 등이 있다.
연암은 44세 때(1780년, 정조 4년) 박명원을 수행하여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熱河)까지 갔다. 그의 대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이때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이용후생에 관한 그의 구체적 견해가 담겨 있다. 그의 실학사상은 ‘이용후생’을 한 다음에 정덕(正德)을 할 수 있다는 방법으로서, 도학의 입장과는 정반대로 도덕보다 실용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 50세 때 이후는 지방 수령으로서 자신의 이용후생론을 실험하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구체화하였다.
《열하일기》에서는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 풍요하게 하기 위한 이용후생론을 제시하며, 조선사회의 편견과 타성의 폐단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그 개선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배청의식 속에서 수용되기엔 어려운 외침이었다.
한양을 출발한 연암은 평양을 지나 만주 거란 여진이 살고있는 동북아 삼성을 거쳐 북경에 도착하는 팔십일 간의 일기를 당시 파격적인 언어로 기록하고 있다.
상중하로 되어있는 방대한 분량은 객지에서 느끼는 자유로움에서 파생된 자유분방한 사고와 중화 문명에 대한 찬탄으로 조선 지식인 사회의 보수적 시스템을 비판한다.
그는 문명의 발전에 의해서 붕괴되는 아시아를 바라보며 우물안 개구리가 되어 두려움에 처한 조선과 당파로 얼룩진 선비나 지식인들을 날카롭게 공격한다. 그는 화강암으로만 이루어진 자재를 벽돌로 바꿀것을 주창하며 국제관계에 대한 탄력적인 언급을 서슴치 않는다.
국가와 민족, 그리고 가족과 나의 한계를 넘기위해 최선을 다한 인물로 조선이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통로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실학사상을 소설을 통해서도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선비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연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인물로는 고종 때 우의정을 지냈던 그의 손자 박규수가 있으며 그의 실학 사상을 계수하여 개화 사상을 열어준 인물로 비중이 크다.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26권 10책.〈연암집 燕巖集〉에 수록되어 있다. 44세 때인 1780년(정조 5)에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베이징(북경)에 가게 된 삼종형을 따라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남긴 기록이다. 당시 사회 제도와 양반 사회의 모순을 신랄히 비판하는 내용을 독창적이고 사실적인 문체로 담았기 때문에 위정자들에게 배척당했고, 따라서 필사본으로만 전해져오다가 1901년 김택영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다.
책의 구성은 크게 2부분으로 나뉘는데, 1~7권은 여행 경로를 기록했고 8~26권은 보고 들은 것들을 한 가지씩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도강록〉은 압록강에서 랴요양에 이르기까지 15일간의 기록으로, 굴뚝과 구들 등 여염집의 구조와 배, 우물, 가마, 성(城)의 제도 등 배울 만한 것이 있으면 자세히 서술하면서 모든 물건을 이롭게 쓸 수 있어 백성의 생활이 윤택해져야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다는 이용후생의 주장을 폈다. 이와 같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정조의 문체반정의 표적이 되기도 했으나 물리적 제지는 없었다. 연암은 일상적, 구체적 어투와 자유로운 문체를 사용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관심과 비난을 한 몸에 받았다. 문체가 새롭다는 것은 생각이 바뀌고 새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열하일기 도강록에서
6월 24일 신미(辛未)
아침에 보슬비가 온종일 뿌리다 말다 하다.
오후에 압록강을 건너 30리를 가서 구련성(九連城)에서 한둔하다. 밤에 소나기가 퍼붓더니 이내 개다. 앞서 용만(龍灣) 의주관(義州館) 에서 묵은 지 열흘 동안에 방물(方物 선물용 지방 산물)도 다 들어왔고 떠날 날짜가 매우 촉박하였는데, 장마가 져서 두 강물이 몹시 불었다. 그동안 쾌청한 지도 벌써 나흘이나 되었는데, 물살은 더욱 거세어 나무와 돌이 함께 굴러 내리며, 탁류가 하늘과 맞닿았다. 이는 대체로 압록강의 발원(發源)이 먼 까닭이다. 《당서(唐書)》를 상고해 보면,
“고려(高麗)의 마자수는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마치 오리머리처럼 푸르르매 ‘압록강’이라 불렀다.”
하였으니, 백산은 곧 장백산(長白山)을 말함이다.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를 ‘불함산(不咸山)’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백두산(白頭山)’이라 일컫는다. 백두산은 모든 강이 발원되는 곳인데, 그 서남쪽으로 흐르는 것이 곧 압록강이다. 또 《황여고(皇輿考)》에는,
“천하에 큰 물 셋이 있으니, 황하(黃河)와 장강(長江)과 압록강이다.”
하였고, 《양산묵담(兩山墨談)》 진정(陳霆)이 지었다. 에는,
“회수(淮水) 이북은 북조(北條 북쪽 가닥)라 일컬어서 모든 물이황하로 모여들므로 강으로 이름지은 것이 없는데, 다만 북으로 고려에 있는 것을 압록강이라 부른다.”
하였으니, 대체 이 강은 천하에 큰 물로서 그 발원하는 곳이 시방 한창 가무는지 장마인지 천 리 밖에서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이제 이 강물이 이렇듯 넘쳐흐름을 보아 저 백두산의 장마를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하물며 이곳은 예사의 나루가 아님에랴. 그럼에도 마침 한창 장마철이어서 나룻가 배 대는 곳은 찾을 수도 없거니와, 중류(中流)의 모래톱마저 흔적 없어서 사공이 조금만 실수한다면,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정도이다. 그리하여 일행 중 역원(譯員)들은 다투어 옛 일을 끌어대어 날짜 늦추기를 굳이 청하고 의주 부윤[灣尹] 이재학(李在學) 역시 비장(裨將 사신에게 시중드는 관원)을 보내어 며칠만 더 묵도록 만류했으나, 정사(正使)는 기어이 이날 강을 건너기로 하여 장계(狀啓)에 벌써 날짜를 써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고 보니, 짙은 구름이 꽉 덮였고 빗기운이 산에 가득했다. 소쇄(梳灑)가 끝나자 행장을 정돈하고, 가서(家書)와 모든 곳의 답장을 손수 봉하여 파발(把撥) 편에 부치고 나서, 아침 죽을 조금 마시고, 천천히 관(館)에 이르렀다. 모든 비장들은 벌써 군복과 전립(戰笠)을 갖추었는데, 머리에는 은화(銀花)ㆍ운월(雲月)을 달고 공작(孔雀)의 깃을 꽂았으며, 허리에는 남방사주(藍紡紗紬) 전대(纏帶)를 두르고 환도(環刀)를 찼으며, 손에는 짧은 채찍을 잡았다. 그들은 서로 마주 보고 웃으면서,
“모양이 어떻소.”
하며 떠든다. 그 중에 노 참봉(盧參奉) 이름은 이점(以漸), 상방(上房) 비장 은 첩리(帖裏) 첩리는 방언(方言)으로 철릭[天翼]이라 한다. 비장은 우리 국경 안에서는 철릭을 입다가, 강을 건너면 협수(狹袖)로 바꿔 입는다. 를 입었을 때보다 훨씬 우람스러워 보인다. 정 진사(鄭進士) 이름은 각(珏), 상방 비장 가 웃음으로 맞으면서,
“오늘이야 정말 강을 건너게 되겠죠.”
하자, 노 참봉은 옆에서,
“이제 곧 강을 건너갈 것입니다.”
한다. 나는 그 둘에게,
“옳지 옳아.”
했다. 거의 열흘 동안이나 관(館)에 묵어서 모두들 지루한 생각을 품어 훌쩍 날고 싶은 기분이다. 가뜩이나 장마에 강이 불어서 더욱 조급하던 참에 떠날 날짜가 닥치고 보니, 이제는 비록 건너지 않으려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멀리 앞 길을 바라보니, 무더위가 사람을 찌는 듯하다. 돌이켜 고향을 생각하매 운산(雲山)이 아득하여 인정이 여기에 이르자 서글퍼서 후퇴할 의사가 싹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평생의 장유(壯遊)라고 하여 툭하면,
“꼭 한번 구경을 해야지.”
하고, 평소에 벼르던 것도 이제는 실로 둘째에 속할 것이고, 그들의,
“오늘에야 강을 건넌다.”
하면서 떠드는 것도 결코 좋아서 하는 말이 아니고, 곧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일 뿐이다.
역관 김진하(金震夏) 2품 당상관 는 늙고 병이 위중하여 여기서 떨어져 되돌아가게 되자, 정중하게 하직하니 서글픔을 금하지 못하였다.
조반을 먹은 뒤에, 나는 혼자서 먼저 말을 타고 떠났다. 말은 자줏빛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날카로운 머리에 짧은 허리, 더구나 두 귀가 쭝긋한 품이 참으로 만리를 달릴 듯싶다. 창대(昌大 연암의 마부(馬夫) 이름)는 앞에서 견마를 잡고 장복(張福 연암의 하인 이름)은 뒤에 따른다. 안장에는 주머니 한 쌍을 달되 왼쪽에는 벼루를 넣고 오른쪽에는 거울, 붓 두 자루, 먹 한 장, 조그만 공책 네 권, 이정록(里程錄) 한 축을 넣었다. 행장이 이렇듯 단출하니 짐 수색이 아무리 엄하단들 근심할 것 없었다.
성문(城門)에 못 미쳐 소나기 한 줄기가 동에서 몰려든다. 이에 말을 급히 달려 성 문턱에서 내렸다. 홀로 걸어서 문루(門樓)에 올라 성 밑을 굽어 보니, 창대가 혼자 말을 잡고 섰고, 장복은 뵈지 않는다. 조금 뒤에 장복이 길 옆 한 작은 일각문(一角門)에 버티고 서서 위아래를 기웃기웃 바라보더니 이윽고 둘은 삿갓으로 비를 가리며 손에는 조그만 오지병을 들고 바람나게 걸어온다.
알고 보니 둘이서 저희들 주머니를 털어서 돈 스물 여섯 푼이 나왔는데, 우리 돈을 갖고는 국경을 넘지 못하는 터에 그렇다고 길에 버리자니 아깝고 해서 술을 샀다 한다. 나는,
“너희들 술을 얼마나 하느냐.”
“너희들 술을 얼마나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둘은,
“입에다 대지도 못하옵죠.”
하고 대답했다. 나는,
“네놈들이 어찌 술을 할 줄 알겠니.”
하고 한바탕 꾸짖었다. 그러나 나는 한편으론 스스로 위안하는 말로,
“이도 먼 길 나그네에겐 한 도움이 되겠구나.”
하고, 혼자서 잠자코 잔 부어 마실 제 동쪽으로 용만(龍灣)ㆍ철산(鐵山)의 모든 메를 바라보니 만첩의 구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에 술 한 잔을 가득 부어 문루 첫 기둥에 뿌려서 스스로 이번 길에 아무 탈 없기를 빌고, 다시금 한 잔을 부어 다음 기둥에 뿌려서 장복과 창대를 위하여 빌었다. 그러고도 병을 흔들어 본즉, 오히려 몇 잔 더 남았기에 창대를 시켜 술을 땅에 뿌려서 말을 위하여 빌었다.
담에 기대어 동쪽을 바라보니, 무더운 구름이 잠깐 피어 오르고 백마산성(白馬山城) 서쪽 한 봉우리가 갑자기 그 반쪽을 드러냈는데, 그 빛이 하도 푸르러서 흡사 우리 연암서당(燕巖書堂)에서 불일산(佛日山) 뒷봉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싶었다.
홍분루 높은 다락 막수 아씨 여의고는 / 紅粉樓中別莫愁
두어 기마 가을 바람에 변방을 달리었네 / 秋風數騎出邊頭
그림배에 실은 퉁소 장고 어이하여 소식 없나 / 畵船簫鼓無消息
애끊고 추억할 제 우리 청남 첫째 골을 / 腸斷淸南第一州
이 시는 유혜풍(柳惠風) 영재(?齋)가 일찍이 심양(瀋陽 봉천(奉天))으로 들어갈 때 지은 것이다. 내 이제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읊고 나서,
“이건 국경을 넘는 이가 부질없이 무료한 정서를 읊은 것이겠지. 제 이곳에서 무슨 그림배ㆍ퉁소ㆍ장고 따위를 얻어서 놀이를 했단 말인가.”
하고, 홀로 크게 웃었다. 옛날에 형경(荊卿)이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할 제 머뭇머뭇 떠나지 않는지라, 태자(太子)는 그의 마음이 변하지나 않았나 의심하고, 진무양(秦舞陽)을 먼저 떠나 보내고자 하였다. 형경은 이에 노하여 태자에게 꾸짖기를,
“내 이제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동지(同志) 한 분을 기다려 함께 떠나려 함이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형경이 부질없이 무료한 말을 한 듯싶다. 태자가 만일 형경의 마음을 의심할진대 이는 그를 깊이 알지 못하였다고 말할 것이리라. 그러나 형경의 기다리는 사람이란 또한 진정코 한 개의 성명을 가진 실재 인물은 아닐 것이다. 대체 한 자루 비수(匕首)를 끼고 불칙한 진(秦)에 들어가려면 저 진무양 한 사람이면 족할지니 어찌 별도로 동지를 구하리오. 다만 차디찬 바람에 노래와 축(筑)으로 애오라지 오늘의 즐거움을 다했을 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지은이는 그 사람이 길이 먼 탓으로 오지 못할 것이라고 변명하였으니, 그 ‘멀리’라는 말이 참 교묘한 칭탁이다. 그 사람이란 천하에 둘도 없는 절친한 벗일 것이요, 그 약속이란 천하에 다시 변하지 못할 일일 것이다. 천하에 둘도 없는 벗으로서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할 떠남을 당하여 어찌 날이 저물었다고 오지 않았으리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반드시 초(楚)ㆍ오(吳)ㆍ삼진(三晉)의 먼 곳이 아닐 것이요, 또 반드시 이 날로써 진으로 들어가기를 기약하여 손잡고 맹세한 일도 없는 듯싶다. 다만 형경이 의중(意中)에 문득 생각나는 어떤 벗을 기다린다 하였을 따름이어늘, 이 글을 적은 이는 또한 형경의 의중(意中)의 벗을 이끌어다가 그 사람하고는 부연 설명하였으나, 그 사람이란 어떠한 사람인지 알지 못함을 말함이니, 저 알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서 막연히 먼 곳에 살고 있는 이라 하여 형경을 위로함이요, 또한 그 사람이 혹시 오지나 않을까 하고 기다릴까 저어하여 그가 오지 못할 것임을 밝혔으니, 이는 형경을 위하여 그 사람이 오지 못한 것을 다행히 여긴 것이다. 정말 천하에 그 사람이 있다 하면, 나는 이미 그를 보았을 것이다. 응당 그 사람의 키는 일곱 자 두 치, 짙은 눈썹에 검은 수염, 볼이 처지고 이마가 날카로웠을 것이다. 어째서 그럴 줄 알리오마는 이제 내 혜풍(惠風)의 이 시를 읽고 나서 안 것이다. 혜풍(惠風)의 이름은 득공(得恭)이요, 호는 영재(?齋)다.
정사(正使)의 전배(前排) 기치(旗幟)와 곤봉(棍棒) 따위를 앞에 세웠으므로 전배라 한다. 가 설렁이면서 성을 나서니, 내원(來源)과 주 주부(周主簿) 내원(來源)은 나의 삼종제(三從弟)요, 주 주부(周主簿)의 이름은 명신(命新)인데, 모두 상방의 비장이다. 가 두 줄로 서서 간다. 채찍을 옆에 끼고 몸을 솟구어 안장에 올라 앉으매 어깨가 으쓱하고 머리가 꼿꼿한 품이 미상불 날쌔고 용맹스럽긴 하나, 부대 차림이 너무 너털거리고, 구종들의 짚신이 안장 뒤에 주렁주렁 매어달렸으며, 내원의 군복은 푸른 모시로 헌 것을 자주 빨아 입어서 몹시 더부룩하고 버석거리는 것이 가히 지나치게 검소를 숭상함이라고 말하겠다.
조금 뒤에, 부사(副使)의 행차가 성에 나감을 기다려서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행하여 가장 뒤떨어져 구룡정(九龍亭)에 이르니, 여기가 곧 배 떠나는 곳이다. 이때, 만윤(灣尹)은 벌써 장막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 서장관(書狀官)이 맑은 새벽에 먼저 나가서 만윤과 함께 합동 수사함이 전례이다. 방금 사람과 말을 사열(査閱)하는데, 사람은 성명ㆍ거주ㆍ연령 또는 수염이나 흉터 같은 것이 있나 없나, 키가 작은가 큰가를 적고, 말은 그 털빛을 적는다. 깃대 셋을 세워서 문을 삼고 금물을 뒤지니, 중요품으로 황금(黃金)ㆍ진주(眞珠)ㆍ인삼(人蔘)ㆍ초피(貂皮 수달피)와 포(包) 이외에 남은(濫銀)이었고, 영세품(零細品)은 새 것이나 옛 것을 통틀어 수십 종에 달하므로 이루 다 헤일 수 없었다.
구종들에는 웃옷을 풀어 헤치기도 하고 바지 가랑이도 내리 훑어보며 비장이나 역관에게는 행장을 끌러 본다. 이불 보퉁이와 옷 꾸러미가 강 언덕에 너울거리고 가죽 상자와 종이곽이 풀밭에 어지러이 뒹군다. 사람들은 제각기 주워 담으면서 흘깃흘깃 서로 돌아다 보곤 한다. 대체 수색을 아니하면 나쁜 짓을 막을 수 없고 수색하자면 이렇듯 체모에 어긋난다. 그러나 이것도 실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이다. 용만의 장수들은 이 수색보다 앞서 가만히 강을 건너가는 걸 누구로서 금할 재간이 있으리오. 금물이 발견된 경우에 첫째 문에 걸린 자는 중곤(重棍)을 맞히는 한편 물건을 몰수하고 다음 문이면 귀양 보내고 마지막 문에는 목을 베어 달아서 뭇사람에게 보이게 되어 있다. 그 법의 마련인즉 엄하기 짝이 없다. 이번 길에는 원포(原包)조차 반도 차지 못하고 빈 포도 많으니 남은의 있고 없음이야 따질 것도 없었다.
다담상(茶啖床 교자상)은 초라하고 그나마 들어오자 곧 물려 내니 대체 강 건너기에 바빠서 젓갈을 드는 이가 없다. 배는 다섯 척뿐인데 마치 한강(漢江)의 나룻배와 비슷하되 조금 클 뿐이다. 먼저 방물(方物)과 인마를 건네고 정사의 배에는 표자문(表咨文 국서(國書))과 수역(首譯 역관 중의 수석)을 비롯하여 상사의 하인들이 함께 타고 부사와 서장관과 그 하인들이 또 한 배에 탔다.
이에 용만의 이교(吏校)ㆍ방기(房妓)ㆍ통인(通引)과 평양에서 모시고 온 영리(營吏)ㆍ계서(啓書)들이 모두 뱃머리에서 차례로 하직 인사를 한다. 상사 마두(馬頭) 순안(順安)의 종으로 이름은 시대(時大)다. 의 창알(唱謁) 소리가 채 마치지 못해서 사공이 삿대를 들어 선뜻 물에 넣는다.
물살은 매우 빠른데 뱃노래가 터져 나왔다. 사공이 노력한 보람으로 살별과 번개처럼 배가 달린다. 생각이 잠시 아찔하여 하룻밤이 격한 듯싶었다. 저 통군정(統軍亭)의 기둥과 난간과 헌함이 팔면으로 빙빙 도는 것 같고, 전송 나온 이들이 오히려 모랫벌에 섰는데 마치 팥알같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내가 홍군(洪君) 명복(命福) 수역(首譯) 더러,
“자네, 길을 잘 아는가.”
하니, 홍은 두 손을 마주 잡고,
“아, 그게 무슨 말씀이셔요.”
하고, 공손히 반문한다. 나는 또,
“길이란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닐세. 바로 저 강 언덕에 있는 것을.”
했다. 홍은,
“이른바,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는 말을 지적한 말씀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그런 말이 아니야. 이 강은 바로 저와 우리와의 경계로서 응당 언덕이 아니면 곧 물일 것일세. 무릇 세상 사람의 윤리(倫理)와 만물의 법칙(法則)이 마치 이 물가나 언덕이 있음과 같으니 길이란 다른 데 찾을 게 아니라, 곧 이 물과 언덕 가에 있는 것이란 말야.”
하고 답했다. 홍은 또,
“외람히 다시 여쭈옵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이른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 나는 또 답했다.
“옛 글에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해지고 도심(道心)은 오직 가늘어질 뿐’이라고 하였는데, 저 서양 사람들은 일찍이 기하학(幾何學)에 있어서 한 획의 선(線)들을 변증할 때도 선이라고만 해서는 오히려 그 세밀한 부분을 표시하지 못하였은즉 곧 빛이 있고 없음의 가늠이라고 표현하였고, 이에 불씨(佛氏)는 다만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는 말로 설명하였지. 그러므로 그 즈음에 선처함은 오직 길을 아는 이라야 능할 수 있을 테니 옛날 정(鄭)의 자산(子産) 같은 이면 능히 그러할 수 있겠지.”
이렇게 수작하는 사이에 배는 벌써 언덕에 닿았다. 갈대가 마치 짜놓은 듯 빽빽이 들어서서 땅바닥이 뵈지 않는다. 하인들이 다투어 언덕에 내려가서 갈대를 꺾고 빨리 배 위에 깔았던 자리를 걷어서 펴고자 하나, 갈대 한 그루가 칼날 같고, 또 검은 진흙이 질어서 어찌할 수 없었다. 정사 이하 모두가 우두커니 갈밭에 서 있을 뿐이다.
“앞서 건너간 사람과 말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어도, 다들,
“모릅니다.”
하고 대답한다. 또,
“방물은 어디 있어.”
해도 역시,
“모르옵니다.”
라고, 대답하면서 한편으로 멀리 구룡정 모래톱을 가리키면서,
“우리 일행의 인마가 아직도 거지반 건너지 못하고 저기 개미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곧 그들인 것 같습니다.”
한다. 멀리 용만쪽을 바라보매 한 조각으로는 성이 마치 한 필의 베를 펼쳐 놓은 듯 성문은 흡사 바늘구멍처럼 빤히 뚫려서, 그리로 쬐는 햇살이 마치 한 점 샛별 같아 뵌다.
이때 커다란 뗏목이 거센 물살에 떠내려온다. 시대(時大 상사 마두(馬頭)의 이름)가 멀리서,
“웨이.”
하고 고함친다. 이는 대체 남을 부르는 소리인데, 저들을 높이는 말이다. 한 사람이 뗏목 위에 일어서서,
“당신들은 어찌 철 아닌 때에 조공(朝貢)을 바치려 중국을 가시나요. 이 더위에 먼 길을 가시려면 오죽이나 고생되겠소.”
한다. 시대는 또,
“너희들은 어느 골에 살고 있는 사람이며, 어디 가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냐.”
하고 묻는다. 그는 답하기를,
“우리들은 모두 봉황성(鳳凰城)에 사는데, 시방 장백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는 거요.”
하고,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뗏목은 어느 새 까마득히 가버렸다.
이 즈음에 두 갈래 강물이 한데 어울려서 중간에 한 섬이 이룩되었다. 먼저 건너간 사람과 말들은 잘못 여기에 내렸으니, 그 거리는 비록 5리밖에 되지 않으나 배가 없어서 다시 건너지 못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에 사공에게 엄명을 내려서 배 두 척을 불러 재빨리 사람과 말을 건너게 하였으나, 사공은,
“저 거센 물살을 거슬러 배로 올라감은 아마 하루 이틀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고, 여쭙는다. 사신들이 모두 홧증을 내어 배 일을 맡은 용만의 군교(軍校)를 벌하고자 하였으나 딱하게도 군뢰(軍牢 군대에서 죄인을 다루는 병졸)가 없다. 알아본 즉 군뢰 역시 먼저 건너 잘못 중간 섬에 내렸기 때문이다. 부사의 비장 이서귀(李瑞龜)가 분함을 참지 못하여 마두(馬頭)를 호통하여 용만 군교를 잡아들였으나, 그 놈을 엎을 자리가 없으므로 볼기를 반만 까고 말 채찍으로 네댓 번 때리며 끌어내어서 빨리 거행하라고 호통한다. 용만 군교가 한 손으로 전립을 쥐고 또 한 손으론 고의춤을 잡으면서 연방,
“예에, 예이”
하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배 두 척을 내어 사공이 물에 들어서서 배를 끌었으나, 워낙 물살이 세어서 한 치만큼 전진하면 한 자 가량 후퇴하고 만다. 아무리 호통한들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다.
이윽고 배 한 척이 강 기슭을 타고 나는 듯이 빨리 내려오니 이는 군뢰가 서장관의 가마와 말을 거느리고 오는 건데, 장복이 창대를 보고,
“너도 오는구나.”
하니, 기뻐하는 말이다. 이에 두 놈을 시켜서 행장을 점검해 보니 모두 탈이 없으나, 다만 비장과 역관이 타던 말이 혹은 오고 더러는 오지 않았으므로, 이에 정사가 먼저 떠나기로 했다. 군뢰 한 쌍이 말 타고 나팔 불며 길을 인도하고 또 한 쌍은 보행으로 앞을 인도하되 버스럭거리면서 갈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내가 말 위에서 칼을 뽑아 갈대 하나를 베어 보니,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두꺼워서 화살을 만들 수는 없으나 붓자루를 만들기에는 알맞을 것 같았다. 이때 놀란 사슴 한 마리가 마치 보리밭 머리를 나는 새처럼 빠르게 갈대를 뛰어넘어가니 일행이 모두 놀랐다.
10리를 가서 삼강(三江)에 이르니, 강물이 비단결같이 잔잔하다. 이름은 애랄하(愛剌河)이다. 어디서 발원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압록강과의 거리는 불과 십 리 가량에 불과한데도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음을 보아 서로 근원이 다른 줄을 알겠다. 배 두 척이 보이는데, 꼴이 마치 우리나라 놀잇배와 비슷하나 길이나 넓이는 그만 못하되 제도는 퍽 튼튼하고도 치밀한 편이다. 배 부리는 이는 모두 봉황성 사람으로 사흘 동안을 여기서 기다리노라고 식량이 다하여 굶주렸다고 말한다. 대체 이 강은 너나없이 서로 나다니지 못하는 곳이나, 우리나라의 역학(譯學 역관들의 관계 사업)이나 중국 외교 문서가 불시에 교환할 일이 생기므로 봉성 장군(鳳城將軍 봉황성에 주둔한 중국측 장수)이 이에 배를 준비해 둔 것이라 한다. 배 닿는 곳이 몹시 질척질척하다. 나는,
“웨이.”
하고는 한 되놈을 불렀다. 이는 아까 시대한테서 겨우 배운 말이다. 그 자가 냉큼 상앗대를 놓고 이리로 오므로 나는 얼른 몸을 솟구쳐 그 등에 업히니, 그 자는 히히거리고 웃으면서 배에 들여다 놓고 후유하고 긴 숨을 내뿜으면서,
“흑선풍(黑旋風) 어머니가 이토록 무거웠다면 아마도 기풍령(沂風嶺)에 오르지 못했을 겁니다.”
한다. 주부(主簿) 조명회(趙明會)가 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는다. 내가,
“저 무식한 놈이 강혁(江革)은 몰라도 이규(李逵)는 어찌 알았던고.”
했더니, 조군(趙君)이,
“그 말 가운데는 깊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애초에 이규의 어머니가 이렇게 무겁다면 비록 이규의 신력(神力)으로도 등에 업은 채 높은 재를 넘지 못했으리라는 의미였고, 또 이규의 어머니가 호랑이에게 물려갔는데, 그는 이렇게 살집이 좋은 분을 만일 저 주린 호랑이에게 주었다면 오죽 좋으랴 하는 의미죠.”
하고, 설명해 준다. 나는
“제 따위들이 어찌 이처럼 유식한 문자를 쓸 줄 안단 말이오.”
했다. 조군은,
“옛 말에 눈을 부릅떠도 고무래정(丁) 자도 모른다는 것은 정말 저런 놈 따위를 두고 이름이었건마는, 그는 패관(稗官) 기서(奇書)를 입에 담아둔 상용어(常用語)로 쓰는 것이니, 그들의 이른바 관화(官話)란 게 바로 이런 것입니다.”
하고, 답한다. 이 애랄하의 너비는 우리 임진강(臨津江)과 비슷하다. 여기서 곧 구련성(九連城)으로 향한다. 우거진 숲은 푸른 장막을 둘렀고, 군데군데 호랑이 잡는 그물을 쳐 놓았다. 의주의 창군(?軍)이 가는 곳마다 나무를 찍어서 소리가 온 들판에 울려온다. 홀로 높은 언덕에 올라 사면을 바라보니, 산은 곱고 물은 맑은데 판국이 툭 트이고, 나무가 하늘에 닿을 듯 그 속에 은은히 큰 부락들이 자리 잡고 개와 닭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며 땅이 기름져 개간하기에도 알맞을 것 같다. 패강(浿江) 서쪽과 압록강 동편에는 이와 비교할 만한 곳이 없으니, 의당히 이곳이 거진(巨鎭)이나 웅부(雄府)를 설치함직하거늘, 너나없이 이를 버려두어 아직까지 공지로 남아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고구려 때에 이곳에 도읍한 일이 있었다.”
하니, 이는 이른바 국내성(國內城)이다. 명(明) 때에 진강부(鎭江府)를 두었더니, 청이 요동(遼東)을 함락시키매 진강 사람들이 머리 깎기를 싫어하여 혹은 모문룡(毛文龍)에게 가고 혹은 우리나라에도 귀화하였는데, 그 뒤에 우리나라로 온 사람은 모조리 청의 요구에 의하여 돌려보냈고, 모문룡에게 간 사람들은 많이 유해(劉海 명(明)을 저버린 장수)의 난리에 죽었다. 이리하여 공지가 된 지도 벌써 백여 년에 쓸쓸하게도 산 높고 물 맑은 것만 눈에 띌 따름이다.
모든 노둔(露屯) 친 곳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한다. 역관은 혹 세 사람씩 한 막에, 또는 다섯 사람씩 장(帳) 하나를 쳤고, 역졸(驛卒)과 마부(馬夫)들은 다섯씩 또는 열씩 어울려 시냇가에 나무를 얽어매고 그 속에 들었다. 밥짓는 연기가 자욱히 서리고, 인마소리 소란한 품이 의젓한 한 마을을 이룩하였다. 용만서 온 장수들 한 패가 저희들끼리 한 곳에 모였는데, 시냇가에 닭 수십 마리를 잡아서 씻고, 한편에서는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 국을 끓이며 나물을 볶고, 밥은 낱낱이 기름기가 번지르르하니 그들의 살림이 매우 푸짐하다.
이윽고 부사와 서장관이 차례로 이르렀는데 해가 이미 황혼이다. 30여 군데에 횃불을 놓되, 모두 아름드리 큰 나무를 톱으로 찍어다 먼동이 틀 때까지 환하게 밝힌다. 군뢰가 나팔을 한 마디 불면 3백여 명이 일제히 소리를 맞추어 고함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경비함이다.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군뢰란 만부(灣府)에서 가장 기운 센 자를 뽑아온 것인데, 이 일행 하인들 중에서 특히 일도 많이 하고 먹음새도 제일 세다고 한다. 그 자들 차림차림이란 몹시 우스워서 허리를 잡을 지경이다. 남색 운문단(雲紋緞)을 받쳐 댄 전립(氈笠)에 털상투의 높은 정수리에는 운월(雲月)이나 다홍빛 상모(象毛)를 걸고, 벙거지 이마에는 날랠용(勇) 자를 붙였으며, 쇠붙이로 오려낸 아청(鴉靑)빛 삼베로 만든 소매 좁은 군복에 다홍빛 무명 배자(褙子)를 입고, 허리엔 남방사주(藍方絲紬) 전대(纏帶)를 띠고, 어깨엔 주홍빛 무명실 대융(大絨 웃옷 위에 걸치는 겉옷)을 걸고, 발에는 미투리를 신었다. 그 꼴이야 말로 어엿한 한 쌍의 사내다. 다만 그 말 탄 꼴을 보면 이른바 반부담(半駙擔)이어서 안장 없이 짐을 실었는가 하면, 타는 것도 탄다기보다는 오히려 걸터앉은 셈이다. 등에는 남빛 조그마한 영기(令旗 영(令) 자를 쓴, 군령을 전하는 기(旗))를 꽂고, 한 손엔 군령판(軍令版 군령을 적은 널빤지)을, 또 한 손에는 붓ㆍ벼루ㆍ파리채와 팔뚝만한 마가목(馬家木) 짧은 채찍을 잡고, 입으로는 나팔을 불고, 앉은 자리 밑엔 비스듬히 여남은 개의 붉게 칠한 곤장(棍杖)을 꽂았다. 각방(各房)에서 약간 호령이 있을 때 문득 군를 부르면, 군뢰. 일부러 못 들은 체하다가 연거푸 10여 차례 불러야 무어라 중얼거리며 혀를 차고 하다가는, 금시에 처음 들은 듯이 커다란 소리로 ‘예이’ 하고 곧 말에서 뛰어내려, 마치 돼지처럼 비틀걸음에 소처럼 식식거리면서 나팔ㆍ군령판ㆍ붓ㆍ벼루 등속을 모두 한 쪽 어깨에 메고 막대 하나를 끌며 나간다.
한밤중 못 되어서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어 위로 장막이 새고 밑에선 습기가 치밀어 피할 곳이 없더니, 이내 날이 개고 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드리워 손으로 어루만지기라도 할 수 있을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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