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강의 취재수첩

8,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남산지구’- 나정을 가다.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9. 6. 17. 09:02

경주신문 창간 20주년 특별기획 / 경주의 문화·관광 그 빛과 그림자

 

 

8,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남산지구’

 

나정을 가다.

 

 

 

 

 

 

<나정>

 

벚꽃 망울이 속살을 살짝 내비치는 국도를 따라서 오릉사거리를 지난다. 탑정주유소를 끼고 좌측으로 들어서는 길목 입구에 ‘蘿井’이라고 새겨진 돌 팻말이 서있다. 정형화 된 안내 팻말이 박혁거세왕의 탄생 설화지인 나정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길을 접어든다. 좌측의 송림이 어우러진 나정 출입구는 철문이 반쯤 열려있다.

 

출입구 우측에 세워진 안내 글에는 경주시의 나정 정비 복원 계획이 자세히 적혀있다. 2007년부터 2012년 까지 총 71억 원을 들여서 나정 팔각 건물과 우물, 담장 등을 복원하고 주차장 설치, 도로 이설, 조경 등의 주변 정비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지난 2002년 5월부터 2005년 11월까지의 발굴 기간 동안 신궁으로 추정되는 8각 건물지와 많은 유구가 발견되어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이곳. 복원 후에는 관광지로서 뿐만 아니라 학생들 학습의 장으로 많이 활용될 듯하다. 묵은 잡초에 가려진 비각과 넓은 판석, 약간의 주춧돌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나정 한가운데를 걸으며 2,000년 전의 시간을 유추해본다.

 

알에서 나온 어린 박혁거세왕과 6부촌장의 실존을 마음으로 더듬다보면 우리의 존재 또한 더욱 소중해진다. 이 땅의 거름, 작은 풀 한 뿌리라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긴 시간의 판석에 가려져 있던 나정의 복원을 설레임 속에서 기다려보기로 한다.

 

 

 

 

 

 

<양산재>

 

양산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는 지정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정과 양산재는 연결해서 찾아보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에 함께 소개하기로 한다. 나정에서 조금 더 진입하면 우리의 전형적인 재실 건축물인 양산재가 나온다.

 

천년 왕국 신라가 있기 이전부터 서라벌을 지켜온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양산재라는 현판을 거쳐 들어서면 잔디 깔린 뜰 저 안쪽에 사당이 있다.

 

마침 이날은 대형 버스를 이용해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이 양산재를 찾았다. 부산에서 온 이들은 배씨의 후손으로 참배 차 들렀다고 한다.

 

알천양산촌(이씨), 돌산고허촌(최씨), 취산진지촌(정씨), 무산대수촌(손씨), 금산가리촌(배씨), 명활산고야촌(설씨)의 6촌 촌장들은 기원전 57년,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추대해 신라의 첫 임금이 되게 하였으니 나정과 양산재는 가깝게 위치하고 있음이 당연하다. 사당 문을 열자 이씨, 최씨, 손씨, 정씨, 배씨, 설씨 시조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고 이날 배씨의 후손들은 예를 다해 여섯 위패에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빛과 그림자>

 

나정은 현재 복원 중이라서 무어라 언급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기대를 안고 찾아온 관광객의 입장에선 허탈하다. 자동차 한 대 주차할 공간이나 화장실도 없다. 대로변에서 나정 쪽으로 진입하는 곳 돌에 새겨진 여러 개의 푯말이 어지럽다. 그 푯말 앞에는 부러진 의자가 버려져 있고 이러한 미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 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정을 나와서 양산재로 향해 걷다보면 참으로 재미있는 생각들이 쏟아진다. 두 곳을 잇는 산책로는 박혁거세 탄생 당시의 설화를 재현하여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장이 되게 하면 어떨까. 나정은 복원 후에도 그 특성상 어린이나 학생들이 많이 찾게 될 유적지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쉽게 양심을 파는 이들이 판을 치는 시대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소년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세운 6부촌장의 정신을 깊이 되새겨 보는 일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황명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