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강의 취재수첩

7)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지정 ‘경주역사유적지구’ -7, 산성지구의 명활산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9. 6. 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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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신문 창간 20주년 특별기획 / 경주의 문화·관광 그 빛과 그림자

7,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경주역사유적지구’

2009년 03월 13일(금) 23:48 [경주신문]

 

7, 산성지구 - 명활산성을 가다.




<명활산성>

↑↑ 보문호 진입로 우측에 명활산성 안내판이 보인다.

ⓒ 경주신문



경주시 천군동과 보문동에 위치한 명활산성을 찾아간다. 시내에서 보문 방향으로 진입하다보면, 길이 둘로 갈라지는데 우측 길을 잡고 보문호를 향하다보면 ‘명활산성’ 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산성지구라는 궁금증을 안고 찾은 곳, 인적 없는 그 곳엔 지난여름에 피었다 진 야생초의 잔해가 방문객을 맞는다.

신라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으로 인정, 2000년 11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래 일부 복원된 명활산성 위를 오른다. 근래에 복원 축조된 성은 길이 50m, 3m 가량 높이의 2단으로 쌓았으며 안팎이 돌로 짜여있다.

↑↑ 복원 축조된 명활산성 일부

ⓒ 경주신문



산성 앞쪽으로는 천군동과 보문단지가 보인다. 당시 성의 잔재가 남아있는 명활산 정상 가까운 곳에서는 바다를 건너 감포에서 왕성을 향하는 왜적의 행로를 관측 했을 것이다.

이곳에 오르고서야 얼마나 중요한 요새였는지 실감이 난다. 신라 왕경이 도시로 재정비된 14년간인 자비왕 18년(475년)부터 소지왕 10년(488년) 까지 궁궐의 역할을 했다는 명활산성. 두어 시간 걸어도 그들의 흔적은 없고 크고 작은 돌이 발길을 잡는다.

명활산성의 목적은 왕경 방어였으며 경주의 동쪽 명활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한 성 쌓기의 기법으로 보아 신라 초기 방식으로 보여지고 서기 400년 이전에 쌓았을 이 성은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확장을 했다.

↑↑ 좌측으로 오르면 명활산성 옛 흔적을 만날 수 있다.

ⓒ 경주신문



지금은 무너진 성벽을 겨우 몇 군데에서 볼 수 있다. 안압지에서 발견된 ‘명활산성비’의 일부와 진흥왕 때의 ‘명활산성작성비’(1988년)가 발견되어 당시의 명활산성 축조 상황이 확실히 전해지며, ‘명활산성작성비’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1500년 세월을 건너 명활산성의 축조 상황을 전하고 있는 ‘명활산성작성비’를 잠시 살펴본다. 명활산에 산성을 쌓고 세운 기념비로 산성 축조 당시의 기록이 적혀 있는 비문은 9행 148자이며 비석의 앞면이 꽉 차게 새겨져 있다.

서체는 해서체이고 글자 크기는 1.5~2.5㎝이다. 비문의 내용은 ① 작성 간지가 있는 서두, ② 축조공사 총책임자의 이름, ③ 축성공사 실무자의 이름 및 담당거리, ④ 공사담당 위치, ⑤ 축성참가자의 수, ⑥ 공사기간, ⑦ 글쓴이의 이름 등의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또한 명활산성은 선덕여왕 때 왕위를 노려 난을 일으킨 상대등 비담이 반란의 근거지로 삼았다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 보문호수 길, 전방 우측 명활산성이 시작된다.

ⓒ 경주신문



왕성에 큰 별이 떨어져 정부군의 사기가 꺾여있을 때 김유신 장군이 경주 율동의 성부산에서 연에 불을 붙여 밤하늘에 올려 보낸다. 별이 다시 하늘 올라갔다고 선전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올라 난을 평정했다고 한다.





<기타>
명활산성 외에도 경주에는 신라시대의 여러 산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남산성(남산-왕성인 반월성과 경주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성, 현재 창고터가 남아있음), 선도산성(서악동 선도산에 위치, 서형산성이라고도 함), 북형산성(강동), 부산성(건천 오봉산-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전략의 요충지), 관문성(외동, 울산-산과 산을 연결해서 쌓았음)이 있었고 경주읍성(경주시 북부동-동쪽 성벽 50m만 남아있음)과 궁성 자체가 요새였던 월성이 있다.







<빛과 그림자>

명활산성에서는 신라인의 함성이 손에 잡힌다. 안개처럼 드리워졌던 긴 시간의 간격이 성을 쌓고 왜구를 막으려 했던 산정에 나뒹구는 돌들에 의해 벗겨진다.

그러나 “이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경주역사유적지구’ 인가?”라는 의문이 들만큼 제대로 갖추어진 것이 없다. 물론 성터야 허물어진 채로 보존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산성의 흔적을 찾아가는 산책로는 있어야 하겠다.

경주시에서 명활산성을 정비하고 복원하는 사업이 진행 중이므로 기다려보기로 한다. 주변 환경이 어지러운 것은 우리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책하면서 말이다.










황명강 기자

황명강 기자 violetd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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