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명강의 취재수첩

4.경주의 문화·관광 그 빛과 그림자 - 황룡사지, 분황사를 가다.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9. 3. 3.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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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신문 창간 20주년 특별기획 / 경주의 문화·관광 그 빛과 그림자

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경주역사유적지구

2009년 03월 03일(화) 01:10 [경주신문사]

 

황룡사지, 분황사를 가다.




<황룡사지>



세 시간여 남짓 황룡사지를 걷는 동안, 금당 초석에 앉은 바람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고색 찬연한 목탑 난간에 앉아 까치처럼 짖어보기도 한다.
빈 터가 맞아주는 이곳에선 상상의 즐거움도 잠시, 가없는 존재의 아득함에 망연해진다.

경내가 2만여 평이 넘었다는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년)에 짓기 시작해 목탑을 완공한 해가 선덕여왕 14년(645년)이란 삼국유사, 삼국사기 기록이 있으니 93년 만에 완공된 셈이다. 신라의 보물로 꼽힌 9층 목탑(높이 80m)과 장륙존상(높이 5m, 무게 3만 5,007근)을 석조대좌와 심초석으로 만나야 하는 일은 안타깝지만, 오늘 우리의 행보가 무엇으로 남겨질지에 대한 물음의 시간은 두렵고도 값지다.


↑↑ 황룡사 목탑지, 우츠에 황룡사탑이 새겨진 비가 보인다.

ⓒ 경주신문



황룡사지로 향하는 소로 좌측에는 경작을 멈춘 논들이 있고 우측으로는 발굴을 마친 잘 정리된 풍경이 눈에 든다. 가람배치도가 설명된 안내판을 지나자 인부 대여섯 명이 철망 속에서 발굴 잔여물을 선별해 리어카에 담고 있다. 황룡사지 동편에서는 날라 온 그것들을 쌓는 작업이 분주하다. 한 곳에 정리해 두었다가 폐기처분 할 것이란 말을 들으며 아깝다는 생각을 잠시 해본다. 가지런히 쌓인 그 또한 맛깔스런 조형물이 됨직해서이다.


↑↑ 금당지 대좌 위를 걷고 있는 관광객

ⓒ 경주신문



관광객 한사람이 금당지 장육존상(삼존불입상으로 추정)이 앉았던 대좌 위에 서 있다. 무게가 3만 5,007근으로 황금 1만 198분 들었고 두 보살상은 철 1만 2,000근과 황금 1만 136분을 들여 만들었다는 장육존상은 고려 때 소실되었다. 대좌와 구멍 뚫린 자연석들이 한 때의 존재를 대변할 뿐인 곳, 전문 지식 없는 관광객들은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황사에 들렀다가 왔다는 대구 k대학교 여학생 4명은 황룡사지 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버린다. 그들은 “황룡사지라고 해서 들렀는데 무엇을 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선다.


↑↑ 황룡사지 유적 발굴 후 석재 잔재들

ⓒ 경주신문



목탑지라도 돌아보고 갔으면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경주시에서 추진을 서두르고 있는 복원사업에 기대를 걸어본다. 디지털 문화에 젖어 있는 신세대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천년의 시간을 보여줄 것인가. 경주관광을 시작하기 전에 개념을 이해시키는 코스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을 덧붙여 본다.

호국안민을 위해 건립된 황룡사 9층탑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된(1238년) 이래 770년여 시간을 건너 오늘 우리시대에 복원이 추진되고 있음은 얼마나 큰 사건인가. 경주시민 모두가 한 마음으로 동참해야 할 대역사라는 인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목탑지 앞쪽엔 황룡사 9층 목탑이 새겨진 비가 있는데 뒷면에는 탑을 건립할 당시의 내용을 문명대 교수가 짓고 서예가 정수암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실체 없이도 존재하는 목탑의 잔영 속에는 에밀레종 보다 4배 컸다는 황룡사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 출토 잔여물을 쌓고 있는 모습

ⓒ 경주신문



강당지, 서금당지, 경루지, 중문지, 종루지, 동금당지를 돌아서 남문터 뒤를 걷는다.
1976년부터 1983년까지 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4만여 점에 달하는 유물이 출토된 황룡사지. 남문터 뒤의 이곳은 원형보존이 어려운 잔여 유물들을 모아놓았다. 어느 기둥을 받치던 돌인지, 마른잡초가 껴안고 있는 돌을 밟고 걸어본다.

체험 관광이 별 것인가. 한 쪽에 모셔만 둘 일이 아니라 잘 연구해서 관광객을 부르는 역할을 주었으면 좋을듯하다. 어느 돌을 밟으면 종소리가 들리고 어느 돌을 밟으면 처용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해보자. 잊히지 않는 멋진 추억을 선물하게 될 것이다.




<분황사>



분황사 앞은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용궁지? 아니면 또 다른 유적이 확인 될 것인지 기대가 된다. 1명의 관광객을 위해서도 해설이 가능한지 문의를 했더니 분황사 주재 문화관광해설사는 당연한 일이라며 앞장을 선다. 깊은 전문지식은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그녀가 아름답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라는 느낌을 받은 관광객은 쉽게 낯설음을 떨칠 것이다.

입구 들어서면서 보이는 우측의 종과 대형 목어가 사진을 찍는 중이다.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되었다는 분황사에는 3층 석탑이 있다.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인되지 않고 1915년 일본인이 수리하면서 남은 벽돌모양 돌의 잔재가 담장 옆에 쌓여있다.


↑↑ 분황사 탑 돌문과 금강역사상

ⓒ 경주신문



탑신 1층의 4면에 화강암 출입구가 보인다. 지금도 열리고 닫히기도 한다는 돌문 앞에는 금강역사상 조각이 양쪽에 서 있다. 근육의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이 조각상은 신라 최대의 걸작품으로 전한다. 원효대사의 손이 닿았을 삼룡변어정(우물)과 추사 김정희의 글씨(此和靜國師之碑? 金正喜)를 만나게 되는 화쟁국사비부를 오래 들여다본다. 지금은 찾을 길 없지만 솔거의 관음보살도, 희명의 눈을 뜨게 했다는 천수대비벽화 등 스토리에 비해서 안내판에 적힌 내용들은 매우 허술하다.




<빛과 그림자>

황룡사지 복원에 대한 경주시의 계획은 매우 구체적이고 의지적이다. 그러나 우선은 작은 것에서부터 세심한 노력이 요구된다. 초석이나 대좌 등의 안내판이 필요하다.

남문터 옆에 모아둔 잔여 유물들은 별 문제가 없다면 체험관광에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황룡사지 동편에 쌓고 있는 기와, 도자기 조각 등도 폐기처분이 아니라 제대로 쌓아놓기만 하면 볼거리가 된다. 유물에 대한 관점을 조금만 바꾼다면 말이다.

분황사의 첫 느낌은 안정감이 있고 정겹다. 경내는 그다지 넓지 않지만 스토리가 많은 곳이다. 좀 더 재미있는 구성의 안내판이 필요하다. 그리고 화장실 관리에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

분황사 매표소 직원의 표정은 매우 밝았고 친절했다. 관광객들과 함께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걷다보니 한 생각이 떠오른다. 경주관광을 시작하기 전에 경주에 대한 사전 지식과 그에 따른 역사관을 잠시라도 확인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황명강 기자

황명강기자 violetd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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