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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중 수상자- 원원사에서. |
ⓒ 경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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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사람이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문화인으로서의 삶 다음 세대를 잇는 돌다리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
"경주의 문화를 아끼는 분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때로는 구경하면서 즐기다보니 많은 세월이 흘렀네요. 버려진 문화재가 수습되어 하나 둘 정비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기쁨이자 주어진 역할에 대한 보람이었습니다” 선생의 경주 사랑법은 그러했다. 누구에게도 심중을 말하는 법 없이 묵묵하게 행동으로 실천했고 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경주인이라면 누구나 천년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것을 지키려는 마음 또한 마찬가지일텐데 나의 행적을 과대평가하지 말았으면 한다”는 말로 지나온 날들을 겸손하게 대하신다. 그러나 우리 문화의 중요성을 자각하기 시작한 지난 반세기 동안 경주의 역사서에서 선생의 이름 석 자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햇살 눈부신 남산 기슭에서, 노서동 골목길에까지 그 발자취는 진흙길 돌다리처럼 선명하게 남겨져 있다.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유복했던 유년기 “경주는 나의 이상을 그릴 수 있게 해준 화선지였다”
1931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선생은 일찍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함경북도 청진에서 무역업(한지 수출)을 시작한 부친을 따라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성공한 사업가였던 부친은 선생의 나이 13세 무렵 경주에 정착하게 되었고, 전학한 계림초등학교 졸업 후 6년제 경주중학교와 경북대학교 사범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어른들의 반대로 역사학을 전공하게 된 선생은 1956년 경주공업고등학교 교사로 교직에 몸을 담는다. 그 후 예천여고, 경주여고를 거쳐 문화중·고등학교에서 교감으로 정년퇴임 시까지 40년 동안 후학을 기르는 한편 경주의 문화 계승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당시 선생의 열정은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 하나가 문화중학교 특별활동반 이야기다. 화가의 꿈이 못내 아쉬웠던 선생은 문화중학교 교실 두개를 학교 측으로부터 빌려 미술반 아이들과 숙식을 함께 하며 미술지도를 했다. 각종 대회를 휩쓸었던 제자들 중 상당수는 그 영향을 받아 현재 학계의 교수로 또는 명망 높은 미술가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물감으로 그리지 않았을 뿐이지 선생은 경주가 있어서 마음껏 이상의 그림을 펼칠 수 있었음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고 회상하신다. “경주는 나의 이상을 그릴 수 있게 해준 빛깔 고운 화선지였다”고.
‘어린이박물관학교’에서 강의 하던 대학시절부터 신라문화동인회 회장, 경주문화원 원장으로 이어진 경주사랑
“대학시절 ‘어린이박물관학교’에서 윤경렬 선생님과 당시 박물관장이셨던 진홍섭 선생님 등을 모시고 강의하던 때가 어제일 같습니다. 1954년 선생님들께서 주축이 되어 만드신 ‘어린이박물관학교’는 반세기를 지나 오늘에 까지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때 강의를 듣던 어린아이가 자라서 박물관장이 되고 학예사가 되었습니다” 경주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열정을 가진 여러 선생님들로 해서 역사의식과 문화의식을 가진 인재가 자라게 되었음을 선생의 말씀에서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김태중 선생의 경주사랑은 1956년 창립되는 신라문화동인회의 창립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본격화 된다. ‘오산골마애불’을 회원들과 함께 발견했을 당시의 기쁨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모든 일정에 부지런하게 참여하던 선생은 부회장에 이어 회장을 맡아 신라문화동인회가 주최해온 시민문화강좌를 활성화시키고 문화유적답사를 중요히 여겨 그 사업에 최선을 다한다. 이번 6월로 시민문화강좌는 549회를 맞았으며 500회를 넘은 정기답사 또한 현재까지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경주문화 보존에 앞장서 온 신라문화동인이 함께 만든 문화종합지인 ‘천고’가 현재 61호까지 발간된 데에도 선생의 힘이 컸으리라 예측되지만 굳이 함께 했던 이들에게 공을 돌리신다. 2000년에 경주문화원 원장으로 추대되어 4년 동안 경주문화의 틀을 다졌고 국가의 재산이라서 많은 임대료가 부과되었던 문화원을 각고의 노력 끝에 무상임대를 받은 일 등은 김태중 선생의 큰 공이라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한국미술문화대상전 추천. 초대작가와 경북미술대전 초대작가. 심사위원, 신라미술대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경북예총부지부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과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문위원, 신라문화선양회 회원, 동리목월기념사업회 발기인, 경주시문화상 심사위원, 경주신라문화엑스포 조직위원, 경주시사 집필 및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내세울 것 없다. 할 말도 별로 없다” 40년 수집한 유물 기증한 참 신라인의 발자취
"교직 퇴임 당시 40년 이상 수집한 신라 유물을 문화중고등학교에 기증했지요. 경주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과를 졸업한 인연으로 나머지는 모두 경주대학교 박물관에 기증을 했습니다. 공부하는 이들의 자료로 쓰였으면 하는 내 뜻에 맞게 전해져서 기쁩니다”며 선생은 환하게 웃으신다. 귀한 것은 자손들에게 대물림하려고 애쓰는 범인들에 비하면 선생의 뜻은 가늠할 수 없이 높은 곳에 닿아 있었다. “내세울 것도 할말도 별로 없다”고 겸손해 하시는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다보면 얼마나 오랫동안 경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낮밤을 바쳤는지 알 수 있다. 경주박물관대학 발간의 ‘토기’, ‘문화재 독본’을 공동 집필했고 ‘경주읍성’, ‘만의사’, ‘포석정’, ‘경주왕릉과 십이지상’ 등 6편의 논문을 ‘경주문화’, 경주대학교지에 발표했고 만화가 이현세씨에 의해 탄생한 ‘만화로 본 경주역사’ 제작 때는 자료와 원고를 제공하기도 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고 온몸으로 실천한 선생의 공을 상으로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두 번의 문교부장관상, 한국문화재협회장상, 경주시문화상, 서울신문사의 향토문화대상, 국민훈장 목련장, 대통령 표창, 포항mbc 삼일 문화상 본상 등을 수상해 선생을 따르는 이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극진한 아내의 마음, 이제야 그윽하게 들여다봅니다
선생이 계신다는 신라문화체험장을 찾은 오후, 방패연 만들던 일손을 내려놓고 따뜻한 차를 권하신다. 오랜 공인으로 활동하신 열정의 원천이 궁금했는데 이날은 기꺼이 답을 내놓으셨다. 경주 교리 출생인 부인 김영혜 여사의 극진한 내조는 말로 표현하시기가 어렵단다. 15년 교직생활을 하면서 2남 1녀를 기르셨는데 그 후엔 오로지 선생의 건강과 신념을 위해 뜻을 받들었다고 한다. 장남 도형씨는 경주에서 인쇄업인 ‘진성기획’을, 차남은 광양제철소에서 중책을 맡고 있고 미술을 전공한 장녀는 포항 mbc에 근무하고 있다. 먼저 가신 부모님과 가족, 스승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는 김태중 선생. “극진한 아내의 마음을 이제야 그윽하게 들여다 본다”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슬며시 내비치신다. “경주 시민들의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기쁩니다. 향토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의 계승은 물론이고 새로운 문화의 창출이 필요합니다. 경주에 문화를 연구하는 독립된 기관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램이지요” 선생은 신라에 이어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아우르는 역사박물관의 필요성과 보존보다 개발의지가 너무 강하면 안된다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하셨다. 선생이 걸어오신 자취가 있어 이다음, 또 그 다음 세대를 이어갈 돌다리는 어긋남 없이 실하게 놓여질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한번 경주시민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취재.글 황명강 기자
사진 최병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