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김용락
아침 출근길 아파트단지 담장에
호박 넝쿨이 맹렬한 기세로 앞을 향해 내닫고 있다
고양이 수염 같은 새순도 기세등등하다
처서 백로 다 지난 지 언제인데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한때는 저 호박 넝쿨에 대고도
무릎 꿇고 살지 않겠다는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을 노래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오늘 아침에는
시골 토담 위에서 아침 이슬 맞으며
가늠할 수 없는 허공과 미래를 향해
자신의 내면을 밀어 올려
자식새끼 둥둥 달고 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는다
큰 놈 작은 놈 잘생긴 놈 조금 못난 놈을
이젠 늙어버린 줄기에 올망졸망 두루 달고
도심 아파트 담장 위에서 전진하는 母性
그 뜨거운 풍요를 바라본다
별
-김용락
도종환 시인이 요양하고 있는
속리산 기슭 보은 법주리 조종골
하루 산비둘기 한 마리 날아들까 싶은
외로운 산골짝이다
<분단시대> 문학 동인이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음주하고 웃고 떠들고 기념사진 찍고
새벽녘에야 기어코 잠이 들었다
잠결에 눈이 떠져 천장을 보자
창문 밖 저 멀리 별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전교조하고 해직되고 징역살고
마침내 병까지 얻은 그 고마운 마음 곁에
비슷하게 풍상을 겪은 또 다른 얼굴이
십여 개 누워 있다 푸석하게 부은
세월의 흔적이 누워있다
조금 가혹한 것 같지만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그렇게 살아라, 인생
기왕 풍찬노숙인 걸 그게 역사인 걸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잠에 빠졌다
시 같지 않은 시 4
김용락
가만히 생각해보니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반달>의 윤석중옹이 여든의 노구를 이끌고
새싹문학상을 주시겠다고
안동 조탑리 권정생 선생 댁을 방문했다
수녀님 몇분과 함께,
두평 좁은 방 안에서 상패와 상금을 권선생께 전달하셨다
상패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권선생님 왈
"아이고 선생님요, 뭐 하려고 이 먼 데까지 오셨니껴?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을 위해 한 게 뭐있다고 이런 상을 만들어
어른들끼리 주고받니껴?
내사 이 상 안 받을라니더……"
윤석중 선생과 수녀님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서울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이른 오전
안동시 일직면 우체국 소인이 찍힌 소포로
상패와 상금을 원래 주인에게 부쳤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봉화서 농사짓는 정호경 신부님
"영감쟁이, 성질도 빌나다 상패는 돌려주더라도
상금은 우리끼리 나눠 쓰면 될 텐데……"
*권정생 선생은 모든 상을 거절하는데, 윤석중옹이 권선생의 의사를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언론에 새싹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한 데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다.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김용락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아니, 기적소리가 듣고 싶다
가을비에 젖어 다소 처량하게
비극적 음색으로 나를 때리는
그 새벽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방문을 열면 바로 눈앞에 있던
단풍이 비에 젖은 채로 이마에 달라붙는
시골 역전 싸구려 여인숙에서
낡은 카시밀론 이불 밑에 발을 파묻고
밤새 안주도 없이 깡소주를 마시던
20대의 어느날 바로 그날 밤
양철 지붕을 쉬지 안고 두들기던 바람
아, 그 바람소리와 빗줄기를 다시 안아보고 싶다
인생에 대하여, 혹은 문학에 대하여
내용조차 불분명하던
거대 담론으로 불을 밝히기라도 할양이면
다음날의 태양은 얼마나 찬란하게
우리를 축복하던가
그날은 가고 기적을 울리며 낯선 곳을 향해
이미 떠난 기차처럼 청춘은 가고
낯선 플랫폼에 덩그러니 선 나무처럼
빈 들판에 혼자 서서
아아 나는 오늘 밤 슬픈 기적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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