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詩 모음

이정록 시인 - 의자 외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5. 27. 23:15

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가을비



              이정록


단 한번의
빗나감도 없이
오직 정타 뿐이어서



벌레 한 마리
다치지 않는
저 참깨 터는 소리



불길 헤집던 부지깽이가
나이테도 없는 빈 대공을
어루는 소리



골다공증의 뼈마디와
곳간 열어제친 꼬투리가
긴 숨 내쉬는 소리

 

비운 것들의
복 주머니 속으로만
저 초가을 빗소리

 

 

 

겨울편지



                              이정록


처마 밑 고드름을 치고 가는 식전바람같이
뒷덜미 서늘한가 마른 시래기를 들추는 허기진 바람처럼
숨결 뜨거운가 된장찌개 졸아붙는 숯불 아궁이
방고래를 지나 굴뚝까지 다다를 수 있겠는가
무 껍질 벗기듯 제 살 도려내는 겨울바람

고드름 뚝뚝 부러지는 봄 햇살까지 갈 수 있겠는가

 

 

 

 

숟가락



                                이정록


  작은 나무들은 겨울에 큰단다 큰 나무들이 잠시 숨돌리는 사이,
발가락으로 상수리도 굴리며 작은 나무들은 한 겨울에 자란단다
네 손등이 트는 것도 살집이 넉넉해지고 마음의 곳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큰애야, 숟가락도 겨울에 큰단다 이제 동생 숟가락들을 바꿔야겠구나
어른들이 겨울 들녘처럼 숨 고르는 사이, 어린 숟가락들은 생고구마나
무를 긁어 먹으며 겨울밤 고드름처럼 자란단다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福자가 쓰인 숟가락 세 개를
방바닥에 내놓으신다
저 숟가락이 겨우내 크면 세 자루의 삽이 될 것이다



  쌀밥을 퍼올리는 숟가락처럼 나무들 위에 눈이 소복하다 한 뼘 두 뼘
커오를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흰눈이 쏟아지고 홍역인 듯 항아리 손님인 듯
작은 새들이 날아간다



하늘이 다시 한번 털갈이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