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이정록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가을비
이정록
단 한번의
빗나감도 없이
오직 정타 뿐이어서
벌레 한 마리
다치지 않는
저 참깨 터는 소리
불길 헤집던 부지깽이가
나이테도 없는 빈 대공을
어루는 소리
골다공증의 뼈마디와
곳간 열어제친 꼬투리가
긴 숨 내쉬는 소리
비운 것들의
복 주머니 속으로만
저 초가을 빗소리
겨울편지
이정록
처마 밑 고드름을 치고 가는 식전바람같이
뒷덜미 서늘한가 마른 시래기를 들추는 허기진 바람처럼
숨결 뜨거운가 된장찌개 졸아붙는 숯불 아궁이
방고래를 지나 굴뚝까지 다다를 수 있겠는가
무 껍질 벗기듯 제 살 도려내는 겨울바람
고드름 뚝뚝 부러지는 봄 햇살까지 갈 수 있겠는가
숟가락
이정록
작은 나무들은 겨울에 큰단다 큰 나무들이 잠시 숨돌리는 사이,
발가락으로 상수리도 굴리며 작은 나무들은 한 겨울에 자란단다
네 손등이 트는 것도 살집이 넉넉해지고 마음의 곳간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큰애야, 숟가락도 겨울에 큰단다 이제 동생 숟가락들을 바꿔야겠구나
어른들이 겨울 들녘처럼 숨 고르는 사이, 어린 숟가락들은 생고구마나
무를 긁어 먹으며 겨울밤 고드름처럼 자란단다
장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福자가 쓰인 숟가락 세 개를
방바닥에 내놓으신다
저 숟가락이 겨우내 크면 세 자루의 삽이 될 것이다
쌀밥을 퍼올리는 숟가락처럼 나무들 위에 눈이 소복하다 한 뼘 두 뼘
커오를 때마다 나뭇가지에서 흰눈이 쏟아지고 홍역인 듯 항아리 손님인 듯
작은 새들이 날아간다
하늘이 다시 한번 털갈이를 시작한다
'좋은 詩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금빛 모서리 외 2편 - 김중식 시인 (0) | 2008.06.19 |
---|---|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0) | 2008.06.18 |
30) 사라진 손바닥 - 나희덕 시인 (0) | 2008.05.05 |
29) 성탄제 - 김종길 시인 (0) | 2008.05.05 |
28) 순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시인 (0) | 2008.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