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詩 모음

작은 주먹 -정호승시인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8. 1. 20. 09:10

작은 주먹


정호승 


나에게도 벽을 내리치던 작은 주먹이 있었다

절벽을 내리치며 울던 작은 주먹이 있었다

상처 없는 주먹을 지니지 않고서는

먼 길을 떠날 수 없고

이미 먼 길을 떠난 뒤에는

오히려 상처뿐인 주먹이 힘이 된다고

절벽을 내리치고 꼬꾸라지던

슬픈 주먹이 있었다


물론 허공에 흩날리던 눈발을 내리칠 때도 있었다

어이없게도 보름달 한번 되어보지 못한

불쌍한 초승달을 힘껏 내리치고

서둘러 밤길을 헛디디며 달려갈 때도 있었다

나를 배반함으로써 기어이 나의 스승이 된

벗들의 가슴을 내리치고 후회할 때도 있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강한 것을 이긴다는

믿음을 믿지 않기 위하여

밤새도록 가슴을 후려치며 혼자 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꽃봉오리가 꽃잎을 펴듯 주먹을 편다

살아가는 동안 언제나 불끈

주먹을 쥐어야만 되는 줄 알았던 손을 펴자

내 작은 주먹에서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벽이 달려와 내 주먹을 내리쳐도

절벽이 달려와 내 주먹을 내리쳐도

절벽을 뛰어내리는 힘찬 폭포소리가 들린다

거침없이 계곡을 휘돌아 흐르는

맑은 물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