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위의 양지스님
-날마다 태어나는 신라 예술과 양지스님-
1.석장사지에서 듣다
석양 무렵, 카메라를 어깨에 멘 기자 박예리가 석장사터를 찾아 산을 오른다.
잡초가 우거진 야산은 애초에 길이 없었던 것처럼 가시덤불과 칡꽃이 어우러져 통행로를 막아버린 상태였다.
‘이런, 길을 찾을 수가 없네. 잡초와 나뭇가지가 말라버릴 겨울까지 기다려야 하나. 아니야, 마음 냈을 때 가봐야지’ 그녀의 중얼거림은 계속됐다.
한참을 땀범벅이 되어 이리저리 길을 찾다가 운동화 끈을 묶던 그녀는 작은 바윗돌 뒤 샘물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맞아 석장사터 부근에 샘이 있다고 했어 그러고 보니 이 부근인가?’ 박기자는 주변에 나뒹구는 기와조각을 주어들고서야 ‘석장사지’ 팻말을 확인한다.
<석장사지, 현재 동국대학교 뒷편>
어느 듯 봄날 긴긴 해가 지고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그녀는 ‘석장사지’ 라고 적힌 표지석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청설모들도 숨을 죽이는 적막한 산속 그녀가 이곳에 서있는 이유라면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양지스님의 영혼과 교감하고 싶어서였는지 모른다. 손을 더듬어 카메라에 후레쉬를 장착한 박기자는 계속 셔터를 눌러댔다.
몇 년 전 그녀는 TV에서 경주국립박물관 유물 전시회 뉴스를 보면서 양지스님의 존재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 뒤부터 무엇 때문이었는지 양지스님에 대한 자료를 검색하고 사천왕사지 발굴현장을 찾아서 홀린 사람처럼 한나절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이곳 석장사지는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 양지사석조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 일부를 살펴보면, 양지스님이 지팡이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자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가 시주받을 집에 가서 흔들어대며 소리를 낸다. 그러면 그 집에서 양지스님의 석장이 날아와 있다는 것을 알고 시주를 했고, 포대가 다 차면 지팡이가 다시 석장사로 날아왔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일연스님이 기록한 이 신비한 이야기는 양지스님이 이렇듯 비범한 분이었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했다고 여겨지며 영묘사 건립 자금을 위한 양지스님의 절실한 노력을 나타낸 일면도 있을 듯하다. 또 스님이 기거했을 석장사가 西川을 건너야만 오고 갈수 있는 곳이어서 만년에는 홍수라도 나면 활동이 어려웠을 스님의 상황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도 해석이 된다.
석장사가 경주시 석장동 동국대학교 뒤편 산 중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1986년 동국대학교 박물관팀은 양지스님이 주석했다는 석장사 터, 이곳을 발굴하여 스님이 새겼을 연기법송(緣起法頌)과 불탑과 불상의 잔해들, ‘錫杖’이라고 새겨진 조각 등 전탑 벽돌 190여 점을 찾아내었다.
양지스님은 전설의 인물이 아니라 신라시대에 실존했던 인물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였음이 석장사지 뿐만 아니라 경주의 여러 유적지 발굴을 통해서 확인되었다.
지역신문사 기자의 사명감도 한 몫을 했겠지만, 어느 시절의 인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끌림이란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어서 며칠을 벼르던 그녀가 오늘 드디어 양지스님이 계셨다던 석장사지를 찾은 것이다.
그녀가 카메라에 담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엉킨 나무줄기 아래 돌과 기와조각과 흙이 전부인 석장사지 빈터, 숨을 멈추고 몇 초 간격으로 셔터를 누르자 번개의 파편처럼 플래시가 터졌다.
플래시 불빛은 고요함이 주는 적막을 삼키며 어둠속에 숨어있는 모든 것들을 건져 올리겠다는 듯이 번쩍거렸다. 숨이 막힐 듯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으악, 누구야?”
박기자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꺾어진 나무그루터기로 넘어졌다.
무엇을 본 것일까? 그녀는 카메라를 안은 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런데, 바람을 흔드는 나무그림자가 아닌 무명 옷자락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머리엔 갈색 두건을 쓰고 무명옷을 입은 젊은 사내는 가끔 역사책에서 본 신라인의 복장이었다. “놀라지 말아요. 나는 지귀라는 사람입니다.”
“저리가요. 무서워요.”
“놀라지 말라니까요. 난 지귀입니다. 당신을 해치지 않아요.”
“신라사람 지귀 말인가요? 선덕여왕님을 사모했다던?”
“예 맞습니다. 그 지귀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 있나요? 지금은 2017년이지 신라가 아닙니다.
우리말을 당신이 하고 있다는 것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놀라는 것이 당연하지요. 하지만 나는 선덕여왕님을 사모해 불귀신이 된 지귀가 맞아요. 오늘처럼 운 좋게 불빛과 만나면 어쩌다가 내 존재가 드러나기도 하지요. 그러면 사람들은 나를 도깨비라고도 하고 무시하고 지나쳐버리기도 합니다.”
“아, 이런 믿을 수 없는 일도 있군요.”
“나는 당신이 누군지 왜 이곳에 왔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죠?”
“천사백여 년을 불귀신으로 살다보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알게 되던걸요.”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월이 흘러 내 몸속 불이 모두 소멸되는 바람에 오늘처럼 불빛이 나를 감싸주면 이렇게 기자님을 만날 수도 있게 되는 것이지요.”
“당신은 항상 이곳에 있나요?”
“아닙니다. 나는 그리운 자취를 찾아 떠돌고 있답니다. 오늘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중 이었지요”
“그럼 양지스님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게 있나요?”
“예, 조각도 글씨도 뛰어났던 양지스님 말이지요? 내가 알고 있는 스님 중에서 매우 특별하고 귀한 분이었지요.”
“양지스님이 서역인일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있던데? 내 마음이 왜 자꾸 그분의 생각에 사로잡혀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아닙니다. 그는 신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라사람입니다. 당신과는 무관하지 않은 깊은 인연이 있지요.”
“지귀님, 양지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좀 들려주십시오.”
“예, 나와 양지스님은 연배가 비슷해서 어릴 적에는 가끔 만나서 놀기도 했지요.
나는 활리역에 살았고 그의 집은 모량부에 있어서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저잣거리에서 만났을 때 보면
눈빛이 영롱하던 사람이었어요.
홀어머니와 힘겹게 살던 그가 귀족의 영역인 스님이 된 연유는 후일 내가 불귀신이 된 뒤에 알게 됐답니다.
나는 일찍이 선덕여왕님을 사모한 연으로 불덩어리가 되어 세상의 반대편에서 떠돌고 있었지만
양지스님은 신라를 위해 큰 공덕을 여럿 쌓았지요.”
“오늘 저녁 이곳 석장사지에 꼭 올라오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군요. 지귀님,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양지스님에 대한 이야기들을 죄다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지요. 인간의 일생은 짧다고 하지만 양지스님의 이야기는 아주 길어요. 아프고도 장엄한 삶이었지요.
예술가로서 승려로서 신라사람들의 자랑이었던 양지스님을 존중하는 당신의 진정성이 느껴지니까 들려드리도록 하지요.
이 저녁에 홀로 석장사지를 찾은 당신과 양지스님과의 안타까운 인연까지 말이지요.”
“내가 양지스님과 닿은 인연이 있었나요?”
“있지요. 몸서리치게 깊은 인연이랍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양지스님을 가장 사랑했고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그의 어머니였답니다.
그 후 몇 생을 살아도 잊지 못하고 이곳을 찾아왔는가 봅니다.
박예리 기자는 분명 신라시대에는 외롭게 양지스님을 기른 ‘모라’라는 이름을 가진 양지스님의 어머니였습니다.
아버지는 뛰어난 화랑이었는데 양지스님을 안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떴지요. 이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아, 지귀님 왜 이렇게 머리가 아픈가요?”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온몸을 스치는 선득함에 벌떡 일어난 박예리기자는 어두운 산길을 휘청휘청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날부터는 꿈속인 듯, 현실인 듯 지귀로부터 듣게 된 양지스님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2.출생과 성장
다섯 살 때부터, 누군가 흘리고 간 책을 주워서 혼자 들여다보며 글을 깨우치던 아이 수리는 훌쩍 15세 소년으로 자라서도 마루에 앉아 목간에 새겨진 글씨들을 종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단석산 중턱 암자에까지 가서 얻어온 목간에는 당나라사람들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서기 617년 선덕여왕이 즉위하기 15년 전인 신라 26대 진평왕 때였다.
수리는 여섯 살 무렵부터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글을 스스로 깨우치고 쓰는가하면 사계절 흘러가는 냇물과 집 주변의 짐승들을 집 흙벽에 그려 넣기도 하고, 어머니를 위해 절구통을 만드는 등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인근마을에 날 정도로 총명했다.
남의 옷을 지어주고 마을 잔치가 열리면 음식을 해준 품으로 살아가지만 수리의 어머니 모라는 험한 일을 마다않고 귀하게 수리를 키웠다.
마을사람들도 성년이 되지 않은 아이였지만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 수리에게 찾아와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곧잘 의논을 하기도 했다.
신라 최고의 불교 예술의 장인, 당시의 예술과 문화적 교류와 사회상에 대한 귀한 예술작품인 글씨, 조각, 기와 등을 남김으로서 현대인들에게 그 시대상을 짐작하게하고 역사연구의 귀한 사료를 남긴 양지스님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고 남의 일을 말없이 도와주는 등 고승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수리의 어머니 모라는 네 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모량부의 외진 마을로 들어와 쓰러진 집에 흙을 바르고 나무를 덧대어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험한 의복을 입었지만 외모가 곱고 마음이 착한 모라는 금방 마을사람들과 친해져 그들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잔치가 있는 날이면 마음을 활짝 열어젖히고 수다를 떨던 마을 아낙네들이 물어봐도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 수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들을 수 없었다.
또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듯 아무도 묻지 않게 되었다. 다만 수리라는 아이의 이름을 아버지가 지어주었다는 것만 모두들 알고 있는 정도였다. ‘수리’는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뜻인데, 아이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생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학식이 있는 이들만 짐작 할 따름이었다.
수리의 어머니 모라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저 맑은 눈빛으로 아들의 말과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다.
15세가 된 소년 수리는 며칠 전부터 단석산 기슭을 자주 찾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신라 진골출신의 귀족이었던 자장스님이 명상수행을 위해 며칠 묵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장스님은 이미 많은 공부를 하여 신라인들이 흠모하는 스님이었기에 수리의 처지로는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 이른 새벽, 어머니를 위해 약수를 가지러 갔던 소년 수리가 해 뜨기 전에 산책을 나온 자장스님을 만나서 대면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수리는 스님 앞으로 나아가 앉아서 정성껏 뜬 약수바가지를 두 손으로 올렸다.
자장스님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약수를 받아 몇 모금을 마시고는 웃는 낯으로 바라보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수리’ 라고 합니다.”
“사는 곳은 이곳에서 가까우냐?”
“예, 산 아래 저편 모량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 나도 모량부에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만..... 물맛이 참으로 좋구나.”
자장스님은 그 말을 남기고는 휘적휘적 절을 향해 걸아가고 있었다.
한동안 스님을 바라보던 수리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에다 몇 번이고 절을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이러한 수리의 행동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장스님을 받드는데 전념하고 있는 ‘설귀’라는 행자스님이었다.
또래인 듯한 소년의 눈빛이 너무도 총명하고 남루한 옷을 입었는데도 천해보이지 않은 것이 기분 나쁜 듯 고개를 흔들며 절 쪽으로 사라지는 거였다.
당시 신라사회에서는 귀족만이 스님이 될 수 있었고 귀족만이 불교공부와 수행을 할 수 있었으므로 진골 출신의 행자 ‘설귀’에게는 자장스님이 말을 섞는 수리가 달갑지 않은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수리는 다음날도 새벽어둠을 더듬어 자장스님을 만났던 장소로 향했다.
물바가지를 깨끗이 씻어서 손에 들고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길을 바라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멱살을 잡고 흔드는 거였다.
놀란 수리가 돌아다보니 그는 자장스님이 가장 아끼는 행자 설귀였다.
“네깟 녀석이 왜 자꾸 찾아와 얼쩡거리는 것이냐?”
“예 저는 훌륭한 분의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우리 스님이 훌륭한 분은 맞지만 너 같이 천한 놈은 가깝게 있으면 안 되는 것이야. 어딜 감히,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말아라.”
“스님을 꼭 한번만 뵙고 내러가겠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설귀의 잘 수련된 다리가 수리의 등을 걷어찼다.
넘어진 수리는 엎드린 채 말없이 눈물을 흘렸으나 설귀는 기분이 좋은지 팔을 흔들어가며 자리를 뜨는 거였다.
집에 돌아온 수리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도 먹지 않고 마루 끝에 앉아 종일을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아무 대답도 않고 웃지도 않는 아들을 바라보며 모라는 웬지 모를 불안함이 밀려오는 것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동이 트기 시작하자 수리는 무엇에 홀린 듯 또 산길을 내달려오르고 있었다. 멀리 암자가 보이고 약수터가 가까워오자 숨이 턱에 닿을듯한데 수리는 산길을 걷지 않고 달려서 올라가고 있었다.
“수리가 아니냐?”
자장스님이 물이 담긴 바가지를 내밀면서 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예”
당황한 수리는 스님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목이 마르겠구나. 나를 만나러 온 것이냐?”
“예”
수리가 물바가지의 절반을 비우는 동안 이윽히 바라보던 자장스님이 또 물었다.
“네가 누군가를 참 많이 닮았구나...그래 왜 자꾸만 나를 찾아오느냐?”
“저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왜 공부를 하고 싶은가?”
“세상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수리의 말을 듣던 자장스님이 얼굴에 웃음을 짓더니 “따라 오너라” 하며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꿈을 꾸는 건 아닌가싶어 고개를 흔들어보던 수리는 법당으로 스님을 따라 들어갔다. 늦잠에서 일어난 자장스님 행자 설귀가 눈을 힐끗 거렸지만 수리는 그것을 알아챌 마음의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자장스님의 움직임에만 촉각을 세운 터였다.
“수리야 세상에 대해 배워서 무엇을 하고 싶으냐?”
고개도 들지 못하고 꿇어앉아 있던 수리가 갑자기 자장스님 곁으로 다가와 옷자락을 잡으며,
“스님, 스님의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스님께 불법을 배워서 불법을 실천하며 세상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신분도 알 수 없는 아이가 스님이 되고 싶다는 말에, 자장스님도 촛대에 불을 붙이던 행자 설귀도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저는 꼭 스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저의 신분이 미천하여 승려가 되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쓰일 곳을 찾아주십시오.” 라며 엎드리는 거였다.
말없이 바라보던 자장스님이 조용히 수리의 손을 잡았다.
“수리야, 오늘은 내가 이곳 암자를 떠나는 날이다. 서라벌 궁성으로 가는 길에 네 어머니를 만나보겠다. 이만 내러가거라”
법당 밖에서 이 말을 듣던 행자 설귀가 문을 열어젖히며
“스님 안 될 말씀입니다. 저런 천한 것의 집에는 왜 들리신다는 겁니까?
오늘 덕만공주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기별이 오지 않았습니까?” 라며 수리를 흘겨보았다.
자장스님은 대답 대신
“수리야 어서 집으로 내러가거라 내가 갈 것이니” 라며 주춤거리는 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수리는 잘 손질해두었던 살구나무뿌리를 꺼내서 다듬기 시작했다. 하루 동안 매만진 나무는 매끈한 목탁으로 변신했다. 지금껏 그렇게 깔끔하고 균형이 맞는 목탁을 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잘 만든 아들의 솜씨에 놀라면서도 모라의 가슴 한쪽은 서늘하게 내려앉는 거였다.
어느 듯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문도 없는 모라의 집에 자장스님이 들어선 것이다. 수리와 모라를 번갈아 바라보던 자장스님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고개를 몇 차례 끄덕이는 거였다.
“어머니 자장스님이십니다.”
수리가 소개를 하자
“스님 어찌 이 누추한 곳을 찾아주셨습니까. 귀하신 스님께옵서...”
“귀하고 천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수리가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이 있다고 하기에 책을 몇 권 주려고 들렀습니다.” 라며 설귀에게 들려온 책 보따리를 수리에게 전해주었다.
수리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책을 받고는 정성껏 다듬은 목탁을 자장스님께 공손히 바치는 거였다.
“고맙구나. 잘 만든 목탁이로구나. 너의 선물을 귀하게 간직하마. 수리야 이 책들을 잘 읽어 보거라. 스승은 곁에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란다. 배움은 너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야” 모라와 수리의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선 자장스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께 서라벌 궁궐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먼저 간 벗의 그리운 얼굴을 자꾸만 떠올리는 거였다.
자장스님이 다녀간 뒤 수리에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글씨와 그림과 조각에 뛰어난 천재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예능에 능했던 수리는 활달한 성격이라서 밖을 나돌며 자랐다. 친구들과 어울려 신기한 물건이 많은 저잣거리를 자주 찾았고 또래 아이들 외에 어른들과도 잘 섞였던 것이다. 그런데 자장스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오로지 방안에 틀어박혀 조용히 책을 읽는가하면 그 책들을 베끼고 다시 소리 내어 읽기도 하며 도무지 문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이 훌쩍 지난 어느 날, 수리의 어머니 모라가 하염없이 눈물을 닦으며 울고 있었다.
“어머니 눈물을 거두시고 저를 보내주세요.”
“네가 갈 길을 결국은 스스로 정하였구나. 수리야 너는 꼭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될 것이다.”
“어머니 이렇게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디 가서도 항상 어머니를 생각하며 착하게 살겠습니다.”
“수리야 너는 천한 사람이 아니다. 때가 되면 네가 누구인지 어미가 알려줄 것이니 자장스님을 잘 모시도록 해라.” 라며 수리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이었다. 뜻밖에 듣는 어머니 말이 놀랍기는 했지만 눌러앉아 되물어볼 겨를이 없었다.
수리는 행장 보따리에 몇 안 되는 의복과 자장스님이 주신 책을 넣고 어머니에게 선물로 만들어드렸던 머리빗을 챙겼다. 어머니 모라의 머리카락이 서너 개 끼어있는 빗을 소중하게 싸서 넣는 수리의 어깨는 작은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3.출가와 수행의 길
자장스님을 따라나선 수리는 스님과 행자들이 저만치 걸어가는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친구들이 있는 고향마을을 돌아다보면서도 모량부를 떠나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는 기대감과 운이 좋으면 많은 책을 읽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걸음이 가벼웠다. 비록 심부름을 할지라도 흠모하던 자장스님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이 수리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리의 앞날은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던 신라에서 미천한 신분인 수리의 천재성은 늘 화근이 되었다.
시기와 질투가 칼날처럼 수리를 따라다녔던 것이다.
모량부를 떠난 수리는 자장스님을 가까이 모시지는 못해도 멀리서 시중을 들며 몇 년을 보냈다. 다행히 자장스님은 수리에게 불경을 읽을 수 있도록 허락했고 스님의 설법을 마당 밖에서라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을 깃고 나무를 패고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수리는 항상 즐거운 얼굴이었다. 틈틈이 책을 읽으며 나무를 깎아서 목어나 목탁을 만들어 수행스님들에게 선물을 해 칭찬을 받곤 했다. 뛰어난 예능으로 나무 조각을 해서 선물하는 모습, 책을 읽고 글씨연습도 열심이어서 해가 다르게 수려한 필체로 다듬어지는 수리의 거동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자장스님은 늘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4년이 흐른 어느 날, 마침 행자들은 삼랑사에 불사가 있는 날이라서 떠나고 심부름할 일이 없어진 수리는
오전부터 법당에서 홀로 천배를 올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자장스님이 법당을 찾아 수리를 불렀다.
“수리야, 내가 어젯밤 꿈에 부처님을 만났는데 귀한 염주를 선물로 내리셨구나.
너에게 계를 줄 터이니 이제부터 부처님의 제자가 되거라.”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었으나 현실의 벽이 너무도 컸기에 수리의 놀라움은 그 자리에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제부터 너는 수리가 아니고 스님 ‘양지’이다” 작정하고 미리 준비를 하신 듯 자장스님은 수리가 스님으로 거듭나는 예를 갖추어 진행했다.
양지라는 법명을 받은 수리는 더벅머리가 잘려나가고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가 지어주었다는 이름 ‘수리’를 내려놓아도 안타깝거나 슬프지가 않았다.
손끝에서 발끝까지 밝은 촛불이 타고 있는 듯 온몸이 환한 느낌으로 화끈거렸다.
“스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세상을 위해 공덕을 쌓으며 살겠습니다.”
“양지야 부처님의 제자가 된 이상 높고 낮음이 없다. 그러나 절집의 생활도 세상 밖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으니 너를 시기하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당분간 네가 수행할 곳을 마련해 줄 터이니 여기를 떠나거라. 훌륭한 스님이 되어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큰스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자장스님은 눈물을 흘리며 수없이 절을 하는 양지스님에게 바랑을 챙겨주며 그길로 떠날 것을 재촉했다. 아마도 스님들이 돌아오기 전에 양지스님을 떠나보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양지스님은 그 길로 서라벌을 등지고 오랜 수행 길에 올랐다. 진흥왕 때 창건한 고창 선운사는 서라벌에서 멀고 먼 길이었지만 양지스님의 걸음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스물을 갓 넘긴 청년 양지스님에겐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발걸음마다 어머니 모라가 떠오르긴 했지만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양지스님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양지스님의 목적지는 구미 도리사를 거쳐서 고창의 선운사로 가는 거였지만 서라벌에서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는 많은 절이 있었다. 지나치거나 묵어가는 절에서 불사가 있으면 현판글씨를 쓰기도 하고 큰 목어를 조각해주기도 하면서 양지스님은 그것이 수행의 일부임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당시의 신라문화는 불교를 중심으로 꽃피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귀족출신의 스님들이 그 중심에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는 호국불교를 내세워 민심을 아우르고 이와 관련된 건축, 행사, 문화와 관련된 일들은 대부분 스님들이 맡아서 수행했으니, 당시의 스님에 대한 예우를 짐작할 수 있다.
양지스님은 천재성도 있었지만, 수행을 함에 있어서 여타의 스님들보다는 몇 곱절 최선을 다했다. 원래 천민으로 살았던 스님은 의복이나 먹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고 잠을 자는 시간도 아꼈다. 공부에 있어서만은 욕심을 부려 신라를 넘어 당나라의 문물을 공부하는 앞서가는 스님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스스로 신라의 방방곡곡을 떠돌면서 공부하고 어려운 백성들에게 손을 내밀었으므로 양지스님의 이름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님이 된지 수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서기 632년,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리던 진평왕이 서거하고 제 27대 선덕여왕이 신라 의 왕이 되는 커다란 변화가 있어 양지스님도 서라벌로 돌아왔다. 신라와 고구려, 백제 세 나라가 각축전을 벌이던 어려운 때에 덕만공주가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것이다.
아들이 없던 진평왕은 슬기로운 큰딸 덕만공주를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 그동안 많은 준비를 해왔다. 왕권을 강화하는 조직개편을 했으며 당시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특이한 신분제도인 골품제를 확고히 했다. 그래서 신라왕실에 성골 출신의 남자가 없으므로 지혜를 갖춘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단절되었던 왜나라와의 국교도 열어서 일본에 여성천황이 있음을 신라사회에 알려 여성이 왕이 될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시점부터는 전쟁이 더욱 잦아져서 왕은 불교를 통해 백성들을 아우르고 대내외적인 위기를 극복하려고 애를 썼다.
호국불교를 대안으로 한 선덕여왕 시대는 전국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여러 측면의 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 선덕여왕은 어머니와 같은 여성성으로써 백성을 사랑하는 애민정치를 펼쳤다.
훌륭한 인재를 찾아서 등용하고 젊은이들을 뽑아 당나라에 유학을 보내는 등의 앞서가는 교육정책을 실행하기도 했다. 선덕여왕이 국가통치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흔적들은 현대에까지 이르러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지 등의 유적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선덕여왕은 직접 전쟁에 나갈 수 없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아픔을 나누어가지는 왕이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궁궐과 가까운 남천이 흐르는 곳에 터를 잡아 영묘사를 세우기로 했다. 영묘사(靈廟寺)는 명칭 그대로 혼령을 모신 절이다.
훗날 선덕여왕이 이 절을 자주 찾아 전생에 나갔던 병사들의 무사귀환을 빌고 전사한 혼령을 위로였다고 하니 영묘사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큰 불사가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신라의 유명한 스님들이 서라벌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왕이 앉아계신 저 아래 스님들 수십 명이 앉아있었다. 이 자리는 영묘사의 현판과 장륙상과 천왕상을 누구의 주도하에 만드느냐는 관건을 놓고 의논하여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하지만 양지스님은 말석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장스님의 기별로 서라벌에 돌아오기는 했으나 처음으로 맞닥뜨린 벽은 다름 아닌 설귀스님이었다. 원행에서 돌아와 자장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 양지스님을 잡아끌고서는 당장 서라벌을 떠나라는 것이었다.
“신분도 모르는 천한 것을 제자로 삼았다는 이유로 자장스님이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 다시 그 모습으로 서라벌에 나타나지 마라. 재주가 있으면 뭘 하겠나. 너에게 그것을 쓸 기회는 없을 것이다. 당장 떠나거라.”
“스님 이러지 마십시오. 진정 저를 가여운 형제로 받아줄 수는 없겠는지요?”
“형제라니? 가당치도 않은 수작이구나. 목이 날아가기 전에 서라벌을 뜨는 게 좋을 게야 흥”
할 말을 다했다는 듯 설귀스님이 자리를 뜨자 양지스님은 멍하게 퍼질러않고 말았다.
얼마나 그리웠던 서라벌인가.
어머니와 동무들이 있고 자신을 거두어 준 자장스님이 계시는 서라벌에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던가. 그런데 떠나라니. 그것도 당장 떠나라는 설귀스님이 두렵고도 야속했다.
“양지야 그곳에서 뭘 하고 있느냐. 저녁 공양을 해야지. 그리고 그동안의 이야기도 들려주어야지.”
“예 스님”
언제 나타났는지 손을 잡아주는 자장스님에 끌려 저녁공양을 마친 양지스님은 아슬아슬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4.영묘사의 현판, 장륙상, 천왕상과 향가 풍요
무슨 운명이었을까.
영묘사 건립을 준비하는 왕이 계시는 자리에, 젊고 집안 권력이 있는 설귀스님을 추천하는 쪽과 예능이 출중한 양지스님을 추천하는 쪽으로 논의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별 거론의 여지없이 설귀스님에게로 의중이 기울고 영묘사 건립에서의 중요한 부분은 설귀스님이 맡기로 결정이 났다.
설귀스님은 키가 크고 인물이 훤칠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이 가는 인상이었다. 더구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진골 집안이라서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자람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설귀스님은 자존심과 이기심으로 뭉쳐진데다 세속의 욕망을 버리지 못한 전형적인 귀족 스님이었다.
양지스님은 당연한 결과라 여기며 다시 행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설귀스님이 하는 일에 혹여 방해가 되지 않으려면 빨리 서라벌을 떠나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늦은 저녁, 달이 산길을 비춰줄 무렵에 자장스님이 잠든 방 앞에서 삼배를 올린 양지스님이 절문을 나서고 있었다.
"거기 서거라. 어딜 도망치는 것이냐?”
놀라서 돌아보니 그는 양지스님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설귀스님이었다.
“스님 잘 계십시오. 그리고 큰 불사를 맡으셨으니 무사히 마치시길 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설귀스님이 앞을 가로막았다.
“네가 할 일이 있으니 당분간 서라벌에 머물러야겠다. 내가 영묘사 건립의 중요한 일을 맡기는 했으나 일은 네가 좀 해줘야겠다.”
그렇게 미워하면서 빨리 서라벌을 뜨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던 설귀스님이 이번에는 양지스님이 떠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네가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펼쳐도 공은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영묘사는 왕께서 발원하여 짓는 절이니 너의 재주를 모두 보여라. 앞으로는 천민 주재에 스님이 된 것을 눈감아 줄 터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 일만 해주면 된다.”
양지스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다시 절 방으로 돌아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눈물도 보이지 못하고 돌아서던 어머니와 옛 친구들이 아련하게 떠올랐지만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면서 여전히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 채였다.
이른 아침부터 설귀스님은 몇 명의 수행스님들을 동원해 먹을 갈고 있었다. 여왕님의 분부로 일주문을 세우고 절의 현판부터 먼저 걸어놓고 나머지 공사를 하도록 결정이 나서였다.
“설귀스님의 글씨가 기가 막히게 좋단다. 드디어 오늘 보게 되는구나.”
“설귀스님은 글씨뿐만 아니라 조각에도 뛰어나다네...이번에 건립될 영묘사는 기대가 되네.”
“내가 듣기로는 양지스님이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뛰어난 예인이라던데?”
공사에 참여하지 않은 서라벌 백성들까지 한마디씩 할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먹이 다 갈아져서 준비되고 현판에 붙여 조각할 종이가 펼쳐지자 조용한 걸음으로 한 스님이 그 앞에 앉아 붓을 들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靈廟寺(영묘사)라고 쓴 뒤 급히 일어서서 나가는 사람은 설귀스님이 아닌 양지스님이었다.
자리에 서 있던 스님들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도 입을 떼는 이가 없었다. 잠시 뒤에 설귀스님이 나타나 먹물이 채 마르지 않은 현판 글씨를 들고 큰스님들 계신 곳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모양을 바라만보고 있었다.
양지스님은 다시 흙이 잔뜩 묻은 작업복을 걸치고 잠시 손을 내려놓았던 장륙상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그리워하는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부처님을 향한 진실된 마음을 모우기 위해서 합장을 하고 눈을 감은 채였다.
스님은 몇 달째 금당에 안치할 장륙상을 만드는 작업에 몰입하며 정성을 쏟고 있는 터였다. 비록 설귀스님을 대리하는 공사였지만 그가 명예보다 더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여왕님과 서라벌 백성들을 위해 장륙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삼십여 년 간 스스로 익히고 다져온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할 기회를 가까스로 잡게 된 양지스님이었다. 장륙상 만드는 기법을 이전의 돌 조각하는 것에서 벗어나 뼈대를 세우고 진흙으로 소조하는 쪽을 선택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으나 그동안의 경험과 당나라 책을 펼쳐보면서 연구하여 서서히 완성시켜나가고 있었다.
설귀스님의 감시 속에서 일을 하다가 보니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서 어려움이 따랐지만 그래도 양지스님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은 서라벌 백성들의 마음이었다.
불교의 깨달음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른 양지스님이 일체의 잡념을 끊고 참선하는 마음으로 흙을 만져 장륙상을 만드니, 그 소문을 듣고 성 안의 백성들이 양지스님의 작업을 돕기 위해 다투어 진흙을 날라주는 것이었다.
시키지 않아도 백성들 스스로 찾아와 흙을 나르면서, 힘이 들면 스님과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가 그 유명한 향가 ‘풍요’이다. 향가 ‘풍요’는 훗날 삼국유사 <양지사석>조에 기록되어 전해오고 있으며 문학사적으로는 무척이나 큰 의미가 있다.
<향가-풍요>
오라 오라 오라. 來如來如來如.
오라 인생은 슬프더라. 來如哀反多羅
서러워라 우리들은, 哀反多矣徒良
공덕 닦으러 왔네 功德修叱如良
양지스님은 손끝의 재주가 아닌 불교적 영감과 곡진한 정성으로 신라의 백성들과 힘을 모아 장륙상, 천왕상, 목탑, 기와 등을 만들었고 현판의 글을 썼다.
그러나 이 일은 현장에서의 상황이었을 뿐 영묘사가 준공된 뒤 왕실에서 내린 모둔 공을 설귀에게 돌아갔다. 미안하다거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채 양지스님은 서라벌을 떠나 다시 수행의 길에 올라야만 했다.
아들이 떠나고 노심초사 얼굴이라도 한번 볼 날을 기다리던 모라는, 저잣거리 장꾼들로부터 영묘사에 있다는 양지스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선뜻 찾아가보지 못하고 만날 날만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불사를 마친 양지스님이 어디론가 떠나갔다는 소식을 들으며 저려오는 가슴만 쓸어내릴 뿐이었다. 그 오랜 시간 공을 들였지만 남의 이름만 빛내고 떠난 아들의 심정을 백번 헤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함산 끝자락 동해바다가 보이는 작은 암자에서 양지스님은 영묘사가 준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몇 번이나 합장을 하면서 절을 했다.
몇 년 동안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진 영묘사를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는 양지스님은, 마음속에 이미 미움이나 욕망은 사라지고 부처의 깨달음에 다가가고 있었다.
5.양지스님 신라를 떠나다
어느 날 문득 불어오는 바람처럼 운명의 막은 순간적으로 펼쳐지는 것일까.
아니면 영겁으로 쌓여온 인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까.
영묘사가 준공된 이듬해인 636년 신라의 대승이 된 자장법사가 제자들과 불법을 배우기 위해 곧 당나라로 떠날 거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토함산 능선 동해바다가 보이는 작은 암자에 기거 중이던 양지스님은 귀를 의심했다.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되는, 자신에게는 하늘처럼 높은 자장법사님이 무엇을 배우러 당나라로 떠나는 것일까.
‘무조건 따라 가야한다.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당나라로 가면 부처님 태어나신 땅 인도로 가는 길도 열려있다고 했지.’
‘나는 많이 모자란다. 불법도 예술도, 내가 배워서 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문을 외듯 실성한 듯 중얼거리며 양지스님은 단번에 행장을 꾸렸다.
이번에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고국 땅 신라. 어머니가 있는 곳. 양지스님은 모량부의 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꿈속에도 잊지 못한 낯익은 골목길엔 어스름이 깔리고 있었다.
“어머니....”
“잘 오셨어요 스님.....”
모자는 말을 잊지 못하고 한참을 부둥켜안은 채였다.
출가한지 처음으로 찾은 고향집에는 방금 아들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아랫목에 묻어둔 따뜻한 밥으로 어머니 모라가 정성껏 밥상을 차렸다. 양지스님은 밥 한 그릇을 비운 채 하염없이 손을 흔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바랑 깊숙이 넣어둔 머리빗을 만지작거리며 자장법사 일행이 있는 궁성으로 향했다.
자장법사와 제자 10여명이 꾸린 당나라 여행에서는 여전히 말석이 양지스님 자리였으나 뜻밖에도 설귀스님이 영묘사를 관리하느라 합류하지 않았기에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토록 염원했던 당나라를 여행하고 꼭 인도까지 다녀오리라 결심한 양지스님의 심장은 처음 계를 받았을 때처럼 또다시 뜨겁게 출렁거렸다.
긴 여정을 거쳐 일행은 장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장안의 공관사라는 절에 가서 법상스님을 만나 공부를 시작했으며 승광사 절에서 당나라 황제 태종(太宗)을 만나는, 상상할 수 없는 기회도 가졌다.
이는 스승인 자장법사가 그만큼 훌륭하고 신라를 대표하는 스님이었기에 가능했으며 양지스님은 그저 몇 걸음 떨어진 멀리서나마 자리를 채우는 정도였다.
하지만 불교 공부나 당나라 문물을 공부하는 데는 누구보다 철저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자장법사는 후광이 비칠 정도로 큰 대승이었지만 누구보다 양지스님을 먼눈으로 보살폈고 그의 안전에 대한 걱정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만큼 양지스님은 사랑받는 제자였던 것이다.
640년 어느 봄날, 산책에 든 큰스님을 양지스님이 조용조용 뒤따르고 있었다.
“무슨 걱정이 있느냐?”
“...............”
“왜 대답이 없느냐?”
“스님, 저는 천축국으로 가고 싶습니다.”
“얼마나 멀고 힘든 길인지는 알고 있느냐?”
“예, 저는 스님을 모시고 당나라까지 온 것만으로도 이번 생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고맙구나, 더 귀한 인연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는지 모르겠으니... 가거라”
“스님을 끝까지 시봉하지 않고 떠남을 용서 하소서”
“아니다. 이 또한 신라를 위한 길이 될 것인즉...”
산책길에는 화우가 흩날려 자장법사와 양지스님의 대화는 꽃잎위로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6.양지스님과 실크로드
신라를 떠나면서 좀 더 넓은 문물을 접하고 싶어 하던 양지스님의 꿈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이루어졌다. 당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한 수나라를 멸하고 돌궐을 제압하면서 실크로드를 더욱 활발하게 열어, 장안은 동서의 문물과 상인들, 승려, 유학생 등 사람이 흘러넘치는 세계적인 도시였다. 사찰마다 넘쳐나는 불상 조각품과 벽화들을 세밀하게 살펴보며 양지스님의 머릿속은 또 다른 세상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당나라를 통해 넓은 세상을 알게 된 양지스님이 좀 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려 함은 그의 천재성이 더욱 부추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양지스님은 장안을 출발하면서 서역으로 가는 길 중에서 험하다는 천산북로를 선택했다. 마음속에 여전히 꿈틀거리는 설귀스님을 향한 분노와 그리운 어머니 모라마저도 잊고 온전한 자아를 찾는 참 스님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과 맞바꿀 고행의 길을 가 야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길은 정녕코 목숨과 맞바꾸어야 할 만큼 힘들고 고단한 길이었다.
‘현장법사께서 지금도 가고 있을 서역길이다. 나라고 못가란 법은 없다’
양지스님의 결심은 돌보다 단단하고 사막의 태양보다 뜨거웠다. 몇 달이 걸려서 난주(란저우)에 도착했으나 황하를 건너는데 한 달을 소비한 양지스님은 지칠 대로 지쳤다.
장안에서 난주까지는 황량한 사막의 연속이었으니 떠나올 때 자장법사님이 아무도 모르게 건네준 여비도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난주에서 둔황으로 가는 길에는 넓고 광활하게 펼쳐진 고비사막을 지나야 했다. 때마침 여름철이라 날마다 쏟아지는 비를 온몸으로 받기도 하고 몸을 감추기도 하며 오아시스인 과주(안시)에 이르렀다. 장안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양지스님은 다시 몸을 일으켜 둔황을 향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거나 예술작품을 조성하는 막고굴이 있고 초생달 모양의 아름다운 오아시스 월아천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걸어서 하는 여행이라 고달픔이 컸고 허약해진 몸은 병마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양지스님이 추구하는 세상공부에는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일행이 있을 때는 함께 하고 어쩌다 두세 명만 남겨진 길에서도 외로움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그만큼 새로운 공부에 대한 열망이 컸던 이유였다.
고비사막을 넘는다는 건 죽음을 넘는 일이었다.
1년을 걷고 걸어 양지스님은 드디어 둔황에 도착했으나 더 이상 몸이 이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미 불교를 온전히 받아들인 이곳 사람들은 스님들에 대한 예우가 깍듯했고 절이 아닌 일반인들의 집에서도 음식을 대접하며 쉬어가도록 했다.
양지스님은 2년여 동안 둔황에 쉬면서 막고굴을 찾아 뛰어난 예술성으로 불상을 조각하는 스님들과 여러 예술기법을 배우고 익히며 하루도 헛되이 보내는 날이 없었다.
그러나 스님의 목표는 인도였다. 다시 행장을 꾸려서 고창국(투르판)으로 향한다.
여기서는 용감한 양지스님도 주춤거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접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타클라마칸의 밤은 여름에도 추위가 느껴지는 지역이었다.
죽음을 무릅쓴 여행길, 세상은 어떤 길이든 개척해나가는 선구자들이 있어 발전하고 바뀌듯 양지스님도 그 길을 택하여 묵묵히 가고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길을 따라와 고창국에 머물게 되자 먼저 화염산을 올랐고 이곳에서의 아쉬움을 남겨두고 구자국(쿠차)으로 향하니, 세속의 시간으로는 가늠이 어려운 멀고먼 행로였다.
양지스님은 결국 구자국에 도착하자 피접만 남은 상태가 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때, 키질 천불동에서 불화를 그린다는 스님 한분이 정성껏 양지스님을 보살펴주었다. 눈을 떠보니 얼굴모양도 낯선 이국의 스님이 무슨 인연이 닿아서인지 지극히 간호를 해주는 것이었다.
몸을 추스린 양지스님은 인도에서 왔다는 스레얀이라는 그 스님을 따라 키질의 천불동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석굴을 파서 조각을 하고 글씨와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다.
수천 명이 넘는 세계의 스님들이 석굴에 부처님을 새기는가하면 흙으로 주물러 모양을 만들어 붙이는 이도 있었고 불화를 그리기도 했다. 양지스님은 이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재현하면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특히 영묘사 장륙상을 조성할 때 조금 미비했던 문제점도 온전한 해법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갔다. 스님의 마음속에선 서라벌과 인도, 두 곳 모두가 ‘어서 오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키질에서도 인품이 훌륭하고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존경받는 인물이 된 양지스님은 그곳에 남을 생각도 하게 된다.
하지만 모랫 바람이 불어오던 어느 날, 밤새 어머니 꿈으로 뒤척이던 양지스님은 깨우치는 바가 있었다. 비록 하찮은 대접을 받더라도 서라벌로 돌아가 스스로 할 일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자기를 살려준 형제이자 스승이었던 스레얀 스님과 아쉬운 이별을 고하고 서라벌로 향하는 길을 잡았다. 고되고 힘든 귀향길이었지만 한번 지나온 길이었으므로 천산북로 사막을 건너는 일도 두렵지는 않았다.
신라를 떠나올 때 마음속 깊이 깔려있던 초조함과 허전함이 충만한 너그러움과 자신감으로 채워졌으니 인도를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도 험한 사막도 그를 막지는 못했다.
2년이 걸려서 장안에 들어오니 자장법사는 이미 몇 년 전에 신라로 귀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장안에서 신라까지도 만만치만은 않은 길, 하지만 고국을 눈앞에 둔 양지스님의 걸음은 더욱 가벼워졌다.
7.양지스님과 석장사
양지스님의 귀국은 그 누구도 모를 만큼 조용했다. 서라벌을 떠난 지 10년 만이었다.
큰스님이 되어 돌아왔지만 신라사회에서 그의 입지는 여전히 환영받을 상황은 아니었다. 원효대사, 의상대사, 자장율사, 명랑법사와 같은 훌륭한 대승들은 물론이거니와 설귀스님을 비롯한 또래의 스님들이 이제는 큰 자리들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출가를 하고 오랜 수행을 거쳤으나 양지스님은 세속의 인연, 단 한사람 어머니가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신라에 도착하자말자 어머니가 있는 모량부로 달려간 양지스님은 뜻밖에도 슬픈 소식을 접한다. 모라는 아들이 떠난 후 무사귀환을 빌며 날마다 기도를 올렸고 몇 달 전에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면서 마을 친구가 뒷산의 작은 묘지로 그를 안내했다. 양지스님은 바랑속의 머리빗을 꺼내어 가슴에 안고서 하루를 흐느껴 울었다.
서라벌에 돌아와 기거할 곳이 필요한 양지스님은, 서천을 건너 궁궐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진 외진 산기슭 온방골에 터를 잡고 손수 절을 짓기 시작했다.
현재의 동국대학교 뒤편인 이곳에 아담한 절을 세우고 탑과 불상을 새겨 문양을 넣은 흙벽돌로 탑을 쌓았는데, 이 벽돌은 서역에서 하던 기법대로 틀을 만들어 기와를 찍듯 찍어서 제작했다. 이것이 오늘에 전해지고 있는 양지스님의 작품 탑상문전이다.
문양은 불상과 탑을 번갈아가며 표현했다.
양지스님이 서역의 기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양들은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돌출된 양각과 입체감을 강조하여 형상을 부각시키거나 선각형태의 음각으로 만들었다.
<석장사지 출토, 탑상문전>
스님은 벽돌로 작은 탑 하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삼천불을 만들기 시작했다.
잘 만들어진 탑을 절 안에다 모시기 위해 스님은 급하지 않게 그러나 부지런히 작품을 조성해나갔다.
그야말로 신라사회는 당대 최초이자 최고 예인의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다.
서라벌을 떠난 뒤에야 영묘사 장륙상과 천왕상을 조성한 분이 양지스님이었다는 소문이 백성들의 입소문으로 알려진 터라, 스님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스님들과 백성들이 찾아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도왔다.
서라벌은 물론이고 신라 전역에서 양지스님의 덕망과 예술가로서의 큰 활약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덕여왕도 그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석장사를 짓고 탑을 조성하는 동안 정치적으로는 반란이 일어나 나라가 어지러웠고 이듬해 선덕여왕은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양지스님은 자신의 작품세계를 처음으로 발휘할 기회가 주어졌던 영묘사가 선덕여왕의 발원으로 건립되었다는 인연에 항상 왕이 계신 궁궐을 향해 무사안위를 기원했었다.
설귀스님과 여러 스님들의 방해로 대면할 수 없었으나 마음으로 흠모해온 왕이셨기에 안타까움이 너무도 컸다. 백성을 사랑한 여왕과 시대의 예술인 양지스님은 한 번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그렇게 별리의 강을 건너야 했다.
몇 년에 걸쳐 지어진 양지스님이 기거하는 이 절은 석장사라고 불렸다.
양지스님은 석장사에 머물며 끊임없이 예술품을 만들고 있었지만, 불사가 있어서 누군가 요청을 하면 신라 땅 어디를 막론하고 달려가 조언을 해주고 장인들과 어울려 직접 조각을 하거나 글을 써주기도 했다.
묵상에 들었다가는 서책을 읽고 삼천불 조성에 여념이 없는 양지스님.
진정한 예인의 길을 말없이 펼쳐나가는 모습이 때론 모래사막을 걷는 외로운 나그네를 떠올리게도 하였지만 참으로 존귀한 일상이 아닐 수 없었다.
서라벌에는 황룡사에 9층 목탑이 건립되었고, 진덕여왕이 위에 올라 당나라와의 교역이 더욱 활발해졌지만 양지스님은 주로 온방골 석장사에 은거할 따름이었다.
훗날 일연스님은 삼국유사 ‘양지사석’조에서 양지스님의 당시 활약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그 많은 스님들 중에서 양지스님이 거론되었다는 것은 그의 예술성과 덕망이 뛰어났음을 반증함이 아닐까.
8.사천왕사와 양지스님
서천을 건너 양지스님을 찾아오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조용히 살고자 했으나 찾아오는 이들만은 내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사심 없이 가르쳐주는 양지스님이었다.
좋은 의복이나 좋은 음식이 없는 석장사였지만 아름다운 사람으로 넘쳐나는 것이 스님에게는 참으로 행복했던지 늘 웃음을 머금은 모습이었다. 흰 눈썹이 휘날리는 양지스님이 그야말로 살아있는 부처인 듯 마음 아픈 사람이나 몸이 아픈 이들도 이곳 석장사를 찾아들곤 했다. 자장법사가 입적하신지 어언 20여년이 흘렀고 양지스님도 칠순을 넘긴 노승이 되었으나 스님의 예술성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삼국통일전쟁이 마무리되자 문무대왕은 호국사찰 사천왕사를 창건하기 위해 전국의 예인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큰 불사에는 스님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었기에 석장사에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세상의 중심에 서지 않고 변방에 살고자 하는 양지스님은 호국사찰 건립이 무사히 진행되기만을 바랄 뿐, 전돌에 새길 또 다른 문양 틀을 만드느라 바빴다.
긴 여름밤 저녁공양을 마친 스님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앉아있는데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알 것도 같은 그림자였다. 어느 듯 노승이 된 설귀스님이 스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수 십 년만의 해후였다.
“설귀스님 잘 지내셨습니까? 귀한 분이 이곳엔 어쩐 일로?” 놀라며 문밖으로 나서자
“들어갑시다. 양지스님, 소식은 늘 잘 듣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차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게 되었는데 갑자기 설귀스님이 일어나더니 양지스님을 향해 큰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엉겁결에 절을 받게 된 양지스님이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짓자
“양지스님 용서해주시오. 내가 참으로 못난 사람이었소.
젊은 시절 스님의 글과 예능이 너무도 뛰어나 많이 질투 했었소.
질투심이 얼마나 컸던지 그때는 사람을 시켜 스님을 없애버리는 일을 꾸몄을 정도로 나는 못난 사람이오. 하지만 스님을 항상 그리워 했었오.”
“설귀스님 이제 와서 뭣 하러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차나 한잔 드시지요.”
“스님 부탁이 있습니다. 대왕께서 사천왕사를 창건하시는데, 당당히 스님 이름으로 불사를 좀 이끌어주십시오. 신라를 통 털어 스님만한 분은 찾을 수가 없군요.”
“이 노구로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시대를 이어갈 훌륭한 인재들이 서라벌에 많이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이만 저를 용서하시고 스님께서 꼭 나서주시길 간곡히 청합니다.”
“정히 그러시다면 마지막 힘을 내어볼까요?”
밤이 늦도록 들려오는 두 스님의 대화가 어찌나 나지막하고 정다웠던지 잠 못 든 풀벌레들까지 잠재우고 있었다.
9.흙으로 돌아가다
낭산 아래 사천왕사 절터가 정해지고 불사가 시작되자 양지스님은 어디서 그런 열정이 샘솟는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작업에 매달렸다.
천왕상과 탑 아래의 팔부신장 제작을 시작하면서 얼마나 공을 들였던지 일 년 만에 스님의 몸무게가 심하게 줄어들 정도였다. 국가의 안위를 비는 호국사찰이기에 스님의 공력은 더해졌을 것이다.
사천왕사 마당에 세워진 대형 목탑 기단부 한 면에 6개씩, 한 탑에 24개, 두 탑에 모두 48개의 녹유소조상을 조성하는 스님은 어느 때보다 행복해보였다.
기와 만드는 제작기법으로 녹색 유약을 입힌 벽돌판에 갑옷 차림의 화살과 칼을 든 수호신이 악귀를 밟고 부처님의 나라를 지키는 모양이었다. 이 신장은 표정의 선이 굵고 화려한 갑옷에 손발톱까지 세밀한 입체감으로 생생히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뛰어난 생동감을 표현하고 있는 양지스님의 작품을 지켜보며 설귀스님은 신음소리를 냈다. 흙으로 빚어 유약을 발라 구워 만든 것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사천왕사지출토 녹유신장상>
사천왕사가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뭇잎들이 연두로 변하면서 봄이 짙어지고 있는 시절이었다. 연분홍 산벚나무에서 날아오는 꽃향기가 부드러운 바람에 실려와 내려앉았다. 눈을 뚫고 피어났던 매화는 지고 실개천의 버드나무에는 실하게 물이 올랐다. 몇 개 남지 않은 소조상에 유약을 입히던 양지스님은 손에 힘이 빠지는지 꼭 쥐고 있던 작품을 스르르 놓아버렸다.
“꽃향기가 오늘따라 참 좋구나. 흙냄새도 좋고......”
짧은 한마디를 남긴 채 양지스님은 작품을 만지던 그대로 입적을 하셨다. 한 세계가 고요히 문을 닫는 것을 지켜보며 합장으로 이별을 고한 제자들은 스님을 고이고이 석장사로 모셨다.
당대 신라에서 그 재주를 따를 사람이 없었던 양지스님, 고난의 서역 길을 다녀온 원력으로 힘든 이들에게 어렵지 않은 설법으로 세상 이치를 깨우쳐주던 양지 큰스님.
흙으로 부처님의 존귀함을 표현하고, 흙으로 고뇌와 기쁨을 표현하고자 했던 양지스님은 흙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스님의 손끝으로 만져진 걸작품들이 경주국립박물관과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존되어있는 것처럼, 지상에 흙이 존재하는 한 양지스님은 영원히 살아있다.
붙임 - 스토리 작업과정[1]
1. 개요
◇ 천년의 역사를 지닌 신라는 통일신라를 전후하여 불교를 호국불교로 삼고 이를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집결시켰으며 찬란한 문화를 일으켰다. 수많은 절이 건립되면서 탑을 비롯한 여러 불상들이 조성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작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제대로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사람 양지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정확하게 작가명과 작품이 기록된 인물이며 그 유물들이 현존하고 있다. 이에 현대까지 이어지는 신라인들의 문화향유 정신을 규명해보고자 했다.
◇ 신라시대를 통 털어 가장 훌륭한 조각가로 불러지는 양지스님의 예술기법에서 그가 인도나 서역인일지도 모른다는 일설이 있다. 당시는 신라와 당나라가 활발한 외교와 교역이 이루어지던 시점이고 불교가 서역을 거쳐 당나라에서 꽃을 피우던 때이므로, 양지스님은 신라인으로서 충분히 이러한 예술기법을 익힐 기회가 있었다고 예측된다. 스님의 외국인 설은 불가하다고 여겨지며 이를 스토리텔링을 통해 신라인임을 확실시하고자 했다.
◇ 출토유물에서 나온 양지스님의 작품들은 그 이전의 신라적인 표현기법이 아니라 인도나 서역풍인 것은 확연하다. 그렇다면 당시의 신라가 현대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중국을 넘어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인도까지 교역한 국가였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2. 작의
◇ 천재는 평범하지 않고 뛰어난 예술인에게는 아픈 현실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신라 최고의 고승이자 예술가였던 양지스님도 그러하였을 것이라는 설정에서 출발했다. 양지스님이 신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라인임을 확고히 하면서 스님의 성장과 출가를 극적인 전개를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
출생의 비밀에 쌓인 천재성을 가진 소년이 출가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동시대 앞서가는 스님인 자장법사를 등장시켰고 양지스님을 시기하여 긴장감을 조성하는 인물 설귀스님을 등장시켰다.
누구에게나 가슴 저린 이름 어머니와 자식의 애틋한 인연은 머리빗으로 연결했으며 끝내 양지스님의 아버지를 밝히지 않은 것은 그의 생애의 아픔을 더해 예술로 승화시키는 계기를 키우고자 했다.
양지스님의 예술적 표현 기법이 인도나 이란풍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실크로드를 따라가던 스님이 구자국의 키질에서 예술적 재능을 키우며 인도스님 스레얀을 만나서 공부를 하고난 뒤 귀국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영묘사 현판과 장륙상 조성을, 유학 떠나기 전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양지스님과 자장법사와의 출생과 활동연대를 따져서였고, 설귀스님 대신 불사를 실행했던 대리 장인의 마음 아픈 상황을 그림으로써 양지스님의 예술에 대한 의지를 부각시켰다.
서역에서 돌아온 양지스님은 석장사를 짓고 예술작품을 빚게 되며, 그 때도 신라의 백성들과 호흡을 같이한다. 설귀스님과의 회한에 찬 만남. 미움의 끝은 어디인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은 정신세계의 양지스님은 노구를 이끌고 사천왕사 건립에 참여하고, 공사를 마무리할 즈음 사천왕사 건립 현장에서 입적한다.
입적에 있어 사천왕사 현장을 택한 것은, 흙으로 예술작품을 빚던 양지스님이 흙으로 돌아갔고 이 땅에 흙이 있는 한 스님이 살아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3. 등장인물
◇ 양지스님 602~680(설정)
◇ 자장법사 590~658(사실)
◇ 설귀스님 600~?(설정)
◇ 모라 586~?(설정)
◇ 선덕여왕 ?~647(사실)
◇ 진덕여왕 ?~654(사실)
◇ 무열왕 김춘추603~661(사실)
◇ 문무왕 626~681(실제)
◇ 당 태종599~649(실제)
◇ 스레얀스님 598~?(설정)
◇ 지귀 600~현재(설정)
붙임 - 스토리 작업과정[2]
1. 사실개요
삼국유사 양지사석조, 동국대학교경주캠퍼스박물관, 경주국립박물관, 석장사지 발굴, 사천왕사지 발굴 등
◇ 신라의 고승 양지는 우리나라 고대 예술가로서는 최초로 ‘삼국유사’에 작가명과 작품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의 '양지사석(良志使錫)'에 기록된 내용
-삼국유사 義解 제4-
釋良志, 未詳祖考鄕邑, 唯現迹於善德王朝. 錫杖頭掛一布帒, 錫自飛至檀越家, 振拂而鳴, 戶知之納齋費, 帒滿則飛還. 故名其所住曰錫杖寺, 其神異莫測皆類此. 旁通雜譽, 神妙絶比, 又善筆札.靈廟丈六三尊‧天王像幷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書靈廟‧法林二寺額. 又嘗彫磚造一小塔, 竝造三千佛, 安其塔置於寺中, 致敬焉. 其塑靈廟之丈六也, 自入定以正受所對爲揉式, 故傾城士女爭運泥土. 風謠云: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至今, 土人舂相役作皆用之, 蓋始于此. 像(初)成之費, 入穀二萬三千七百碩(或(云)(改)金時租). 議曰:師可謂才全德充, 而以大方隱於末技者也.讚曰:
중 양지는 그 조상이나 고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선덕왕 때에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의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 그 지팡이는 저절로 날아가 시주의 집에 가서 흔들면서 석장 끝에 달린 방울소리를 울렸다.
그 집에서는 또 이를 알고서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었고, 포대가 다 차면 이 석장은 다시 날아서 돌아왔다. 그러므로 그가 거주한 곳을 석장사라고 했다.
양지는 신기하고 특이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으며, 여러 가지 技藝에도 두루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길 데가 없었다. 또 필찰(筆札-원래는 편지라는 의미이나 여기서는 서화 조각등의 손재주)에도 능하여 영묘사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또는 전탑의 기와와 천왕사 탑 밑의 8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 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고, 벽돌로 탑을 하나 만들었으며,아울러 삼천불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시고 예를 드렸다.
그가 영묘사의 장육상을 만들 때에는 입정(入定)해서 정수(正受-마음을 바르고 밝게하여 잡념에서 벗어나 法心만이 있는 경지)의 자세로 만드니 온 성안의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는 이러하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다라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의내여 (서럽다 우리들이여)
功德 닷가라 오다 (공덕 닦으러 오다)
시골에서는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에도 모두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대개이 노래에서 비롯되었다. 장육상을 처음 만들 때에 든 비용은 곡식 2만 3천 7백석이었다. 논평해 보면, 양지스님은 가히 재주가 온전하고 덕이 충만하였다. 여러 방면의 대가로서 하찮은 재주만 드러내는 데 숨어 지낸 자라고 하겠다.
기리어 읊는다.(일연스님 지음)
齋罷堂前錫杖閑, 재 마치니 법당 앞에 석장은 한가한데
靜裝爐鴨自焚檀. 오리 모양 향로를 손질하여 홀로 단향(檀香)피우네.
殘經讀了無餘事, 남은 불경 다 읽어 할일 없으니,
聊塑圓容合掌看. 애오라지 소상의 부처님 얼굴 합장하고 쳐다보네.
◇ 신라시대 최고의 예술가로 평가받는 양지스님에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유물의 연대를 살펴보면 선덕여왕대에서 문무왕대에 이르도록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양지스님이 주석했다는 석장사지(경주시 석장동 산81-2번지)를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에서는 1986년과 1992년 2차에 걸쳐 발굴 조사했다.
발굴조사 결과 출토된 유물들에서 석장사의 사역과 규모, 사명, 그리고 출토유물과 양지스님과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유물들이 출토됐다.
이곳이 석장사였음을 확인시켜 준 유물은 '錫杖'이라고 쓴 묵서 자기로 발굴의 최대 성과였다.
또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수많은 탑상문전은 전탑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삼국유사’에서 3천불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을 뒷받침해 준다.
소조 보살상, 신장상, 연기법송명탑상문전 등은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3년, 2006년 2차례에 걸친 사천왕사지 발굴 시에 출토된 녹유신장벽전 등의 유물에서 70대 이후 양지스님의 작품이라고 학자들이 예측했다.
◇ 영묘사에 대한 「양지사석」의 기록은 장륙상 제작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것으로 백성들이 흙을 나르며 노래한 ‘풍요’는 노동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영묘사의 건립과정에서 불러진 향가 ‘풍요’가 전해짐으로써 문학사적 성과까지 남겼다. 양지스님의 예술 활동은 종교, 미술, 음악 등 신라의 백성들과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2. 참고문헌과 사실적 사진
- 참고 문헌 -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신라 서천의 서안’2008.
◇‘三國遺事’
◇강우방, ‘신양지론’ 47,1991.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래여애반다라’,2006.
◇문명대, ‘신라조각장 양지론’, 2003.
◇신은숙, ‘신라시대 조각가 양지의 소조상 연구 - 사천왕사의 녹유소조상과 영묘사의 장륙 삼존불을 중심으로, 2013.
- 사 진 -
<석장사지 출토, 발소조 틀>
<사천왕사 발굴현장, 1>
<석장사지 출토 탑상문전 탁본>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신장벽전>
<사천왕사 발굴현장,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