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문학자료

향가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9. 10. 23. 13:56

향가(鄕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향가는 고대문학의 얼굴이며 거울이다. 일본의 와카(和歌)가 있고, 중국에 초사(楚詞)와 시경(詩經)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향가와 시조가 있다.

  향가는 향찰(鄕札)이라는 우리식으로 적힌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말하자면 설총의 이두식 표기가 된다. 이는 노래하는 문학의 원형을 보여준다. 노래하는 사연으로는 슬픔과 기쁨, 노여움의 사단칠정이 들국화처럼 함초롬히 피어 있다.

  나라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보다 나은 관계를 이어 가보려고도 하였다. 때로는 앞서 간 누이에 대한 슬픔을 노래하기도 하고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는 길을 노래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심청전의 원형으로서 눈 먼 아이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어머니의 절절한 바람을, 나라 안에 내우외환이 일어났을 때 이에 상응하는 향가를 지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소통하는 감동의 노래가 향가였다. 더러는 일을 하며 힘들 때 향가로서 몸과 마음의 힘을 되살리며 하나 되는 슬기로움의 실마리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향가의 속내는 대략 부처님의 힘을 빌려 주어진 문제를 풀고자 하였다. 더러는 도적을 만나 그들을 향가로 감화시키고 마음의 병을 고치는 문학치료적인 사연들이 가야금의 선율로, 때로는 해금의 애절한 소리로 다가 온다.    

  길은 길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향가가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서 저네들의 만엽집(萬葉集)이라는 또 다른 향가의 맥으로 이어 꽃을 피운다.  

  옛말에 뿌리를 내린 향가는 분명 겨레의 노래였다. 거기에 임금과 백성이 따로 없었다. 이두식으로 적힌 노래들은 알기가 쉽지 않다. 해서 오늘날의 말로 옮겨 알기 쉽게 그러면서도 알아두어야 할 배경 이야기를 노래마다 붙임 형식으로 얼개를 짜보았다.      

  시간이 있을 때에 향가에 드러난 우리 옛 조상들의 노래를 통한 그분들의 사상과 정서를 알고 느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서동요(薯童謠)

             - 무왕(武王) -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정분을 나누고

 맛동 서방을

 밤마다 몰래 안고 가네.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배경 이야기]

 백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고 과부가 되어 백제의 서울 남쪽 못가에 살면서, 연못의 용과 정을 나누어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재주와 도량이 커서 앞으로 큰 일을 할 바탕을 갖추고 있었다. 항상 마(薯)를 캐어 팔아서 생계를 꾸렸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서동'이라 불렀다. 그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고자 머리를 깎아 중의 모습을 하고 신라의 서울로 들어갔다.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면서 그들과 친해지자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이 노래가 <서동요>다.

 이 노래가 대궐에까지 알려져 마침내 선화는 먼 곳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길에 오르는 공주의 애처로운 모습에 왕후는 순금 한 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지로 가는 길에 서동이 나타나 맞이하며 함께 가자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를 모르나 외로운 귀양길에 길동무가 되리라. 마침내 공주는 그와 함께 가게 되었다. 공주는 서동이 믿음직스럽고 좋아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제서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노래의 신통함도 알았다.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보여 주었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오."

"이것은 황금이니 평생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선화가 대답하였다. 서동은,

"이런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캐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

 고 하였다. 선화가 이야기를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아주 귀한 보물입니다. 지금 그 보물이 있는 곳을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께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

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며 금을 모아 산더미와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부탁해 금을 옮길 방법을 물었다. 법사는,

 "내가 알아서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내 주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일을 가상하게 여겨 사위에게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차츰 인심을 얻어 백제의 임금이 되었다.

 

 [글의 얼개]

  성격 : 향가, 민요, 동요, 참요

  형식 : 4구체 향가

  주제 : 그리움, 선화공주의 비행 풍자, 아내를 얻기 위한 계략

  국문학사적 가치 :

    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향가.  

    나) 향가 중 유일하게 동요로 정착된 작품

 

 [알고 느끼기]

 1. 배경 설화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무왕의 이야기'로 보는 풀이

 2. 서동을 백제 동성왕의 이름으로 보고, 그가 신라와 결혼한 사실을 근거로 '동성왕의 이      야기'를 극화한 것으로 보는 풀이

 3. 백제의 익산 미륵사의 이야기에도 '서동 이야기'와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을 근거로, 백      제가 망할 무렵 왕실의 원찰이었던 미륵사를 신라의 군졸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백제      와 신라가 과거부터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꾸미기 위해 퍼뜨린 것으로 보는 풀이

    <서동요>는 소박하고 구김새가 없는 동심이 잘 나타나 있다. 무왕과 연결된 설화의 내      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노래는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에 꿈 많은 한 소년      이 아름다운 공주를 아내로 삼기 위하여 지은 동요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 소년의 슬기가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노래의 작      자를 일러, 영리하지만 뜨거운 사랑의 주인공이라고 하였다.

      이 노래는 질박하고 장난스러운 동심이 서려있는 동요적인 단순성은 있으나, 깊은 문      학적 가치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배경 설화의 내용처럼 '서동'이라는 한 영웅이 시         련을 극복하고 왕이 되기까지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사랑을 위       해 목숨도 희생하는 고대인의 강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영웅의 일생은 결혼이라는 것      에 의해 성공의 실마리가 풀리며, 이 <서동요>는 이러한 성공의 열쇠 구실을 하는 것      이어서 재미를 더해 준다.


[붙임]

1. 서동 이야기는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서동의 출생담", "서동의 결연담", "서동의     등극담", "사찰 연기담"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서동의 출생담을 보면, 인간이 다른 동물     과 어우러져 영웅을 낳는다는 <야래자(夜來者) 전설>과 비슷한 얼개를 지닌다.

2. 참요적 성격이 강한 민요. 참요(讒謠)란 예언적 바람을 얹어 부른 것으로, 장차의 일이      그렇게 될 것임을 미리 예언한 노래.






 혜성가(彗星歌)

               - 융천사(融天師) -


옛날, 동해 가에

건달이 놀던 성을 바라보고

왜군이 또 왔다고

횃불을 올린 변방이었네.

세 화랑이 산 구경 간다는 소식을 듣고

달도 부지런히 밝히려는 가운데  

길쓸별을 바라보고  

혜성이여, 하고 사뢴 사람이 있었네.

아아, 달 아래로 떠나갔는데.

이에 벗들이 빌어 혜성은 사라지고.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遊烏隱城叱肹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

烽燒邪隱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比所音叱彗叱只有叱古    

 

 [배경 이야기]

 신라 진평왕 때의 일이다. 정세가 몹시 어지러워 신라와 일본 사이의 관계가 자못 나빴다. 거열랑, 실처랑, 보동랑이라고 불리는 세 명의 화랑이 풍악(楓岳, 금강산)으로 놀러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혜성이 나타나 심대성(心大星)- 큰 별의 중심을 범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천체의 이변은 종종 나라에 불길한 변란을 가져온다고 생각한 세 화랑은 놀러가는 것을 그만두고 산을 내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왜병이 쳐들어 왔다. 일본의 추고(推古) 천황 8년(600) 일만이 넘는 왜병이 쳐들어 왔다. 이에, 융천사가 단을 쌓고 목욕한 후 이 노래를 지어 부르니, 혜성이 사라지고 국토를 침범한 왜병도 물러갔다고 한다. 이에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화랑들에게 금강산에 놀러가 마음껏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알고 느끼기]

신라 진평왕 때 융천사가 지은 10구체 향가로서, 10구체 형식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노래에 마력이 있어서 영험한 기적을 나타낸다는 것은 고대 가요일수록 으레 동반하는 특성이다. 향가 <혜성가>도 <구지가>, <해가사> 등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 노래를 부르니 혜성이 없어지고 왜구마저 물러갔다는 주술적인 성격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오롯한 참된 마음은 쇠와 돌도 능히 뚫을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사람의 정성과 진심이 담긴 노래나 시가 귀신과 하늘, 땅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믿었던 고대인들의 진솔함이 엿보인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정성이나 진심이 통하는 세상의 중요성을 느끼게 한다.

  이 노래는 향가 중 가장 주술적인 작품이며 축사적인 내용이 담긴 글이다. 그러나 예술적 기교가 담긴 직유법을 사용하였으며, 향가를 신성하고 주술시하는 전통적 정서를 일으킨다.  향가로서는 특이하게 비유와 상징, 그리고 유머와 위트가 거듭되어 있어 하나의 이채로운 맛을 느끼게 하며, 작품의 유래와 별개로 하나의 순수한 서정시로서 뛰어남이 있다.

 

[글의 얼개]

 성격 : 10구체 향가, 주술적 노래.

 주제 : 사악함을 쫓는 축사(逐邪)






























 풍요(諷謠)   

             -양지(良志)-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러운 이 많다네.

 서러움 많은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온다.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衣徒良

 功德修叱如良來如

 

 [배경 이야기]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양지 스님은 지팡이 위에 부대 하나를 걸어두면,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서 공양주의 집에 가서 방울 소리를 내며 알렸다. 그러면 그 집에서 알고 시주를 하는데, 부대가 차면 다시 날아서 돌아왔다. 그래서 그가 있는 절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는데, 그의 헤아릴 수 없는 신기하고 이상한 일들은 모두 이와 같았다. 여기 석장은 지팡이를 이른다.

 그는 글씨와 그림 솜씨도 능했다. 영묘사의 장륙삼존상(丈六三尊像), 천왕사 전탑의 기와, 천왕사 탑 밑의 팔부신장은 모두 그의 것이다. 그는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으며 또한 일찍이 벽돌로 하나의 작은 탑을 만들고, 거기에 3천 부처를 새겨서 그 탑을 절 가운데 안치해 두고 모셨다.

 그가 영묘사 장륙삼존상을 만들 때였다. 선정에 들어가 깊은 삼매의 마음으로 주무르고 문지르는 방법을 삼았으므로, 서라벌의 귀부인들도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느끼고 알기]

 이 작품은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4구체의 민요조 향가다. 선덕여왕 때의 고승이며 대예술가인 '양지(良志)'가 영묘사의 장륙삼존상을 만들 때, 귀부인들까지도 진흙을 나르면서 부른 노래로 일종의 노동요적 성격을 띠는 불교적인 민요다.

 이 노래는 시가의 형식보다는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면에서 여러 가지를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풍요(諷謠)'란, 넌지시 깨우쳐 경계하는 노래를 뜻한다. '풍(諷)'이란 것은 서민들을 통해서 자연발생적으로 솟아오르는 풍자와 익살을 뜻한다. 이런 점에서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의 민심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이 노래에는 '이토시주(泥土施主)'라는 말이 나오는데 재물을 바쳐 시주할 수 없는 신도들이 흙을 나르는 노동을 통해서 시주를 대신하고 이를 통해 공덕을 닦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노래가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겼음을 보여주는 것에도 불구하고, 노래의 내용은 그지없이 처량하고 서글프다. 이 세상의 것은 모두 부질없으니, 이 세상에서 할 일은 공덕을 닦는 일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인생의 무상함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겨내자는 포교적인 향내가 물씬 풍긴다. '서럽다'는 말은 무상함의 의미를 나타내는데, 당시 서민들이 살아가기에는 그만큼 험난하고 어려운 세상살이였으며, 오로지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으로 여기는 민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글의 얼개]

  성격 : 4구체 향가, 민요체, 노동요

  이름 :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 바람결 노래

  표현 : 반복적 리듬의 효과, 제3구의 시상전환, 직설적 표현



























    






 원왕생가(願往生歌)     

                 - 광덕(廣德) -


달님이시여, 이제  

극락까지 가시려오.  

무량수불 앞에  

거듭 옮겨 여쭈옵소서.  

다짐 깊으신 부처님께 우러러  

두 손 모아  

극락왕생을 원합니다, 극락왕생을 원합니다.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옵소서.  

아아, 이 몸을 버려두고  

마흔 여덟 가지 큰 소원을 이루오리까.


月下伊底亦

西方念丁去賜里遣

無量壽佛前乃

惱叱古音多可支白遣賜立

誓音深史隱尊衣希仰支

兩手集刀花乎白良

願往生願往生

慕人有如白遣賜立

阿耶此身遣也置遣

四十八大願成遣賜去

    

(배경 이야기)

 신라 30대 문무왕 시절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은 서로 이웃해 살며 마음이 통하는 벗이었다. 평소에 누군가 먼저 극락으로 갈 때에는 서로 알리자고 약속하였다. 광덕은 분황사 서쪽 마을에서 신을 만들며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한편, 엄장은 남산에 암자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느 날 해는 지고 소나무 그림자가 고요히 저물었을 때 창밖에서

 "나는 이제 서방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나를 따라오시게."

광덕의 소리가 들렸다.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리고 환한 빛이 땅에 무지개처럼 뻗쳐 있었다. 다음 날 엄장이 집에 찾아가 보니 과연 광덕이 죽어 있었다.

 광덕의 아내와 함께 장례를 마치고 나서 엄장이 그녀에게 이르기를,

"광덕이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하오?"

하였다. 그 아내가 허락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 엄장이 정을 나누려 하자 그녀가 말하기를,

"그대가 서방 정토에 가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 올라서 물고기를 얻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엄장이 놀라며,

"광덕도 이미 함께 했거늘 난들 어찌 안 되겠소?"

하였다. 그녀가 말하기를,

"광덕이 나와 십여 년을 함께 살았으나 단 하룻밤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거늘, 어찌 더러운 짓을 하리오.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십육관(十六觀)을 지어서, 이미 진리에 이르렀고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그 빛에 정진하였소. 그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 정토에 가지 않으려고 해도 달리 어디로 가리오. 무릇 천리를 가는 자는 그 첫걸음으로 알 수 있으니, 지금 그대의 믿음은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하였다. 엄장은 부끄러웠다. 곧 원효 대사에게로 가서 배움을 간절히 청하자, 원효 대사는 정관법(淨觀法)을 가르쳐 주었다. 엄장이 그제서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일심으로 불도를 닦아 또한 극락으로 가게 되었다.

 

 [알고 느끼기]

 이 노래는 달에게 빌어서 극락세계에 가기를 소원한 신앙의 노래이며, 불교의 정토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이 노래에서 달의 의미는 매우 중요한데, 달은 광덕이 발 딛고 서 있는 이 승과 아미타불이 계신 저승의 서방정토를 오고 갈 수 있는 존재였다.

 ‘원왕생(願往生)’이란, 극락 가기를 원한다는 말이다. 곧 죽어서 극락에 태어나기를 비는 것이다. 극락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당과 같으며, 불교에선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를 말한다. 이 노래는 소위 아미타불의 48대원을 중심으로 노래한 것인데, 그것은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에 만일 자기가 부처가 된다면 48가지 일을 오롯이 이루겠다고 한데서 비롯된 말이다.

 불교적이면서도 신앙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나 초조와 갈망이 자신의 공덕을 시험해 보고 싶은 바람이 잘 나타난 노래다. 노래에 간직된 정은 소박하고 솔직하다. 그러나 염불을 외워서 서방정토에 가 태어나겠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학식에 물들어 있는 정토관보다는 더욱 서민적이고 또 진실한 삶에 뿌리 내린 종교적 발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부부관계를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맺어진 신성한 계약으로 생각하고, 자기 아내와 더불어 육정의 세계를 뛰어넘는 참된 공을 닦아야만 정토에 갈 수 있다는 것 또한 보통 사람이 쉽게 이룰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글의 얼개]

 성격 : 10구체 향가.  기원가.  서정시가

 표현 : 비유법, 상징법

 제재 : 달

 주제 :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귀의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

  

(지은이에 대한 관점)

⑴ 광덕이라는 풀이 : 광덕이 극락에 가기를 기원하며 늘 부르던 노래

⑵ 광덕의 아내라는 풀이 : 광덕의 아내는 원래 분황사의 계집종이었으나, 실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는 설과, 관음보살이었는지 말하지 않고 광덕이 죽은 뒤에 분황사의 계집종이 되었다는 설, 그리고 광덕을 시험하고 옆에서 극락으로 가도록 도와주는 존재였다는 점과 설화에서 엄장을 꾸짖어 깨우치는 모습에서 관음보살의 화신이라는 설이 온당할 듯하다.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 득오(得烏) -

 

간 봄을 그리워하매

모든 것이 울면서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을 나타내시던

얼굴에 주름살이 지는구려.  

눈 깜짝할 사이에  

만나보게 되리.  

낭이여, 그리워하는 마음에 가는 길  

다북쑥 우거진 험한 길에서 잠을 잘 밤도 있으리.



去隱春皆理米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阿冬音乃叱好支賜烏隱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目煙廻於尸七史伊衣

逢烏支惡知作乎下是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尸    

 

 

 [배경 이야기]

 신라 제 32대 효소왕 때에 죽지랑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고 하는 급간(級干)이 있었다. 화랑도가 된 이후 올려놓고 날마다 나오더니, 한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지랑이 그의 어미를 불러 아들이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당전(幢典)인 모량부(牟梁部)의 익선 아간(益宣阿干)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의 창지기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급히 가느라고 화랑님께 알리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죽지랑은 이 말을 듣고,

 "그대의 아들이 만일 사사로운 일로 그 곳에 갔다면 찾아 볼 필요가 없지마는 공무로 갔다니 마땅히 가서 위로하고 대접해야겠다.”

고 하였다. 죽지랑은 익선의 밭으로 찾아가서 가지고 간 떡과 술을 득오에게 먹인 다음, 익선에게 휴가를 청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그 때 마침 간진이라는 사람이 추화군(밀양) 능절(能節)의 조 30석을 거두어 성 안으로 싣고 가다가, 죽지랑이 선비를 존중하는 풍도를 아름답게 여기고, 익선의 막히고 융통성이 없음을 천하게 생각하였다. 가지고 가던 벼 30석을 익선에게 주면서 득오를 보내도록 청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또 진절사지(珍節舍知)가 쓰는 좋은 말안장을 더 주었더니 드디어 청을 들어주었다.

  조정에서 화랑을 총 지휘하는 화주(花主)가 이 이야기를 듣고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한 마음을 씻어 주고자 하였다. 익선은 도망쳐 버렸다. 그의 아들을 대신 잡아갔다. 때는 동짓달 몹시 추운 날인데 성 안의 못에서 목욕을 시켜 얼어 죽게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모량리 사람은 모두 벼슬에서 몰아내고, 승복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간진의 후손에 대하여는 평정호손을 삼아서 표창하였다. 결국 죽지랑은 부산성 창지기로 고생하는 득오를 구하게 되었다.

  처음 술종공(述宗公)이 삭주 도독이 되어 장차 임명 받은 곳으로 가게 되었다. 때마침 삼한에 병란이 일어나 기병 3천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일행이 죽지령에 이르렀을 때 한 거사가 고개의 길을 닦고 있어 공이 보고 기뻐하였다. 거사도 역시 공의 위세가 당당함을 좋게 여겨 서로는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술종공이 부임지에 간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꿈에 거사가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으므로 더욱 놀랍고 이상히 여겨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었더니,

 "거사가 죽은 지 며칠이 되었다."

고 하였다. 돌아와 말하니 죽은 그 날이 꿈꾼 날과 같았다. 공이 생각하되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라 하고 군사들을 보내어 고개 위 북쪽 봉우리에 장사하게 하고 돌미륵 하나를 세웠다. 그 아내가 꿈꾸던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죽지라 하였다. 자라서 벼슬에 나아가 유신공의 부원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무의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득오곡이 죽지랑을 그리워하여 노래를 지었다.

 

[알고 느끼기]

 득오가 죽지랑이란 화랑을 추모하는 노래다. 죽지랑은 이름난 화랑이며 장군으로, 진덕왕 때 김유신과 함께 국사를 논의하던 술종공의 아들이며 진골 출신이다. 아버지가 미륵상을 세운 뒤 그 공덕으로 태어났다.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벼슬이 이찬에까지 올랐으며, 미륵의 화신으로 여겨질 정도로 높이 추앙받는 인물이다. 작자인 득오는 원래 죽지랑의 낭도였다가 익선에게 끌려가 고난을 겪던 가운데 죽지랑이 구했다는 이야기가 이 노래의 배경이다.

 죽지랑에 대한 사모의 정이 글 전면에 절절하게 드러난다. 이 노래는 죽지랑과 고락을 나누던 지난 시절을 그리워하는 데서 말미암는다. 특히 '이미 가 버린 돌이킬 수 없는 봄'이란 은유를 통하여 청춘 곧 죽지랑과 함께 지내던 때에 대한 추억과 아쉬움을 그리고 있다. 죽지랑의 죽음에 대한 애도에서 이 세상 모두가 슬퍼한다고 표현하여 죽지랑의 고매한 인품을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마지막 7,8행은 10구체 향가의 낙구인 9,10구와 같은 감탄사를 가진 유사성을 보여 주는 동시에, 절묘한 은유적인 표현을 드러낸다. '그리워할 마음의 가는 길'이라는 감정의 형상화와 '다북쑥 마을'이 지니는 쓸쓸함은 득오가 죽지랑을 만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정신적 고독감의 은유적 표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은이의 정서적 절절함이 해가 더할수록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처럼 그릴 수 있다.

  죽지랑을 사모하는 애틋함은 의리에 살고 죽는 화랑의 기상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존경하는 지도자, 나아가 자신이 어려운 처지를 헤아려 몸소 찾아와 자신을 구해준 이의 죽음 앞에서 그를 추모하는 마음은 진정 남다르지 않겠는가.

 

 [글의 얼개]

 성격 : 8구체 향가, 정형시, 추모시

 구성

  * 1,2행 : 돌이킬 수 없는 봄에의 회한

  * 3,4행 : 죽지랑의 늙음에 대한 안타까움

  * 5,6행 : 죽지랑을 보고 싶은 애정의 충동

  * 7,8행 : 만날 수 없음에 대한 탄식

 주제 : 화랑 죽지랑에 대한 추모의 정

 































  헌화가(獻花歌)

          - 어느 노인 -


자줏빛 바위 벼랑에  

어미 소 잡은 손을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紫布岩乎邊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肹不喩慙肹伊賜等

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배경 이야기]

 신라 성덕왕 때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가는 길에 바닷가에 머물러 점심을 먹었다. 그 옆에는 천 길 높이의 바위 봉우리가 있어 병풍과 같이 바다를 둘렀다. 꼭대기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꽃을 보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꽃을 꺾어다 줄 사람이 그 누구인고. "

따르던 무리들이 대답하기를,

 "그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위험하여 모두 불가능한 일이라 했다. 그 때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한 노인이 수로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오고 또한 노래를 지어서 바치었다.  그 노인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알고 느끼기]

 노인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위해 벼랑 위의 꽃을 꺾어 바치려는 노인의 순수성을 느낄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노인의 낭만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부인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벼랑을 탈 수 있었으며, 바다 속의 용까지도 부인을 사모한 것이다. 부인이 아름답지 않았다면 용에게 잡혀간 수로부인을 구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노래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그 '아름다움'에 육체가 쇠한 노인이 죽음의 결단을 서슴지 않고 여인이 원하는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천 길 벼랑에 올라가는 위험을 무릎 쓴 것이다.

  노인이 그 어려운 일을 했으나 따르던 이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름다움'의 진실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실용적인 면에만 매어 있는 사람은, 도저히 아름다움을 알아볼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인격을 소유한 어느 노인이나 바다 속의 용이나 노래를 부르는 민중인 것이다.

 그러므로 희로애락을 겪은, 청년이 아닌 노인을 등장시켜 부인의 원숙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듯. 이런 점에서 수로 부인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나는 미모만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이 외모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었으리라. 여기에서 우리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노래는 삼국유사의 <해가사>와 함께 전한다., <해가사>는 한역되어 전하고, <헌화가>는 향찰로 전해진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낭만적인 멋을 지닌 노래라 할 수 있다.

 

 [글의 얼개]

 성격 : 4구체 향가, 민요풍의 노래, 연가풍의 노래, 서정시가

 주제 : 어느 노인이 수로부인(水路夫人)에게 철쭉꽃을 꺾어 바치며 부른 노래

 

 [붙임]

1. 작품에 대한 여러 가지 풀이

  ⑴ 인간의 욕망과 세속적 노래 → 꾸미 없는 사랑의 노래. 생물적인 성적인 알레고리 인간과 자연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상징 형식의 노래

⑵ 노인의 존재를 인간의 차원을 넘어선 신비의 인물로 간주할 때

신화적 인물이 여성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사랑의 노래, 신들이 인간의 아름다움에 바치는 아름다움의 예찬

⑶ 무속적 제의와 굿노래로 보는 풀이

 [삼국유사]에는 순정공이 부인과 함께 갔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고, 부인 때문에 갖가지 사건이 벌어졌다고 했다. 물길을 뜻하는 '수로'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부인은 용모가 아름다워서 궁벽한 곳을 지날 때마다 귀신 따위에게 빼앗겼다. 이 점은 수로 부인이 무당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자아내게 한다. 민심이 소란하자 순정공은 힘으로 다스리고, 부인은 굿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두 사람이 함께 갔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렇게 보았을 때 <헌화가>는 굿을 하면서 부른 무녀의 노래일 수 있다

 


















 원가(怨歌)

         - 신충(信忠) -

 

때깔 좋은 잣나무는  

가을에도 아니 시들어 떨어지네.  

너를 어찌 잊겠느냐 말씀하시던  

우러르던 낯빛이 달라진 겨울이여  

달 그림자 흐린 연못에  

흐르는 물결에 모래이듯이  

모습이야 바라뵈오나  

누리의 모든 걸 잃은 줄이야


物叱好支栢史

秋察尸不冬爾屋支墮米

汝於多支行齊敎因隱

仰頓隱面矣改衣賜乎隱冬矣也

月羅理影支古理因淵之叱

行尸浪 阿叱沙矣以支如支

貌史沙叱望阿乃

世理都之叱逸烏隱第也

 <後句亡>

      

 

 [배경 이야기]

 신라 효성왕이 임금이 되기 전의 일이다. 어느 날, 어진 선비 신충(信忠)과 더불어 대궐 뜰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다가 신충에게 말했다.

 "뒷날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알리라."

신충은 감격한 나머지 일어나서 절을 하였다. 몇 달 후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이 있는 신하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의 일은 까맣게 잊고서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신충은 왕을 원망하며 노래를 지어 잣나무에 붙였다. 그러자 잣나무가 갑자기 시들고 말았다. 왕이 이를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살펴보게 했다. 신하가 잣나무에 걸려 있는 그 노래를 왕에게 전달하니 왕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나라 일이 바빠서 하마터면 어진 신하를 잊을 뻔했구나!"

이에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니 그제야 잣나무도 되살아났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과 경덕왕조에 걸쳐서 그 신임이 두터웠다.

  경덕왕 22년(763) 계묘에 신충이 두 친구와 약속하고 벼슬을 그만두고 남산으로 들어가 두 번씩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를 깎고 불도를 닦는 사람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산에 숨어 대왕에게 복을 빌겠다 하니 왕이 좋다고 하였다. 영정이 금당 뒷벽에 있다. 남쪽에 속휴라는 마을이 있는데 지금은 와전되어 소화리라 한다. 또 딴 기록에는, 경덕왕 때에 직장 이준(혹은 이순)이 일찍부터 결심하여 나이 50이 되자 마침내 집을 나와 절을 지었다. 천보 7년 무자에 나이 50이었다. 조연의 작은 절을 고쳐 큰 절로 만들어 단속사라 하고 자신도 삭발하고 법명을 공굉 장로라 하였다. 절에 살기 20년 만에 죽었다 하니 삼국사의 기록과는 사뭇 다르다.

 

[알고 느끼기]

 약속을 잊은 임금을 원망하는 향가다.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잣나무에 비하여 인간의 마음이 변덕스러움을 꾸짖는 속내도 아울러 생각해 볼 수 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며 더러는 지키지 못한다. 그러나 너무나 변하기 쉬운 정황에서 때론 서로의 믿음이 깨어져 상처를 받는다.

신충의 마음을 담은 시가 잣나무를 시들게 했다. 신충이 그만큼 굳은 신의를 중요시 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원가는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 신의를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쯤 되돌아보게 한다.

이 노래 뒤에 '후구망(後句亡)' 곧 뒤의 2구가 없어졌다는 말이 적혀 있는데, <삼국유사> 편찬 당시에 후구가 이미 없었기 때문에 노래 끝부분에 '후구망'이라 덧붙인 것이다. 그래서 8구체만 남아 있지만 후구가 없어도 노래의 뜻은 짐작할 수가 있다. 그 노래는 잣나무를 저주하거나 또는 효성왕을 원망하는 내용을 담기보다는 오히려 체념적인 가락이 서려있지 않을까 한다.

연못에 비춰진 달을 왕에게 비유함으로써 고매한 영감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비약법과 생략법 등을 대담하게 부려서 노래한 두드러짐이 있다.

 

 [글의 얼개]

 성격 : 10구체 향가(9,10행은 전하지 않음). 연군가. 주술적 성격

 주제 : 신의(信義)를 잊음에 대한 원망.

 배경 작품 : 고려 속요인 정 서의 <정과정곡>, 민요나 규방가사 등에도 약속을 저 버린 임         에 대한 원망이 담긴 작품들이 있다

 
















 도솔가(兜率歌)   

             - 월명사 -


오늘 여기 산화가를 불러  

뿌리는 꽃이여, 너는  

곧은 마음의 명을 받들어  

미륵님을 모셔지라.


今日此矣散花唱良

巴寶白乎隱花良汝隱

直等隱心音矣命叱使以惡只

彌勒座主陪立羅良  

 

 [배경 이야기]

 신라 경덕왕 19년(760) 4월 초하루 두 개의 해가 나타나 열흘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하늘의 천기를 보는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인연이 닿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散花功德)을 쌓으면 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이에 조원전에 단을 깨끗이 만들고, 임금이 청양루에 나와 인연이 닿는 중을 기다렸다. 그 때 월명사가 남쪽의 두렁길을 걷고 있는 것을 보고, 임금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불러서 단을 열고 기도문을 지으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월명사는 국선(國仙)에 속한 몸으로 향가는 잘 알지만, 노래는 익숙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다."

고 하였다. 월명사는 왕명에 따라 다음과 같은 ‘도솔가’를 지어 바쳤다.

그러자 조금 있다 두 개의 해 중에 하나가 사라졌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차 한 봉과 수정 염주 108개를 내려 주었다. 그 때 문득 한 동자가 나타났는데, 겉모습이 곱고 깨끗하였다. 그는 공손히 차와 염주를 받아 궁전 서쪽 작은 문으로 나갔다. 월명은 이를 내궁(內宮)의 사자라 하였고, 임금은 스님의 행자라고 하였으나 알아보니 모두 아니었다.

왕이 이것을 매우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뒤를 쫓아가 살펴보게 하니, 동자는 내원(內院)의 탑 속으로 숨어 버렸고, 차와 염주는 남쪽 벽화의 미륵상 앞에 놓여 있었다. 바로 월명의 지극한 덕과 정성이 미륵보살을 감동시켰던 것이다. 이어 그를 더욱 공경하게 되었고 명주 백 필을 주어 크나큰 보은의 마음을 나타내었다.

 

 [알고 느끼기]

 이 노래는 하늘에 해 둘이 나타난 괴변을 없애기 위한 의식에서 불린 것이다. 합리적 사고로는 두 개의 해가 나타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두 해가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며, 우회적 표현이다. 천상계와 인간계의 대응으로 보았을 때, 해는 곧 왕, 군주에 값한다. 하늘에 두 개의 해가 등장했다는 것은, 현재의 임금에 대적할 세력을 예고해 주는 것이거나 가뭄을 예보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세력의 출현은 혼돈을 빚고, 그래서 이 혼돈을 조정할 행위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이 같은 사회적 혼란을 조정하기 위하여 행해진 의식이 산화공덕이고, 이 의식에서 불린 노래로 볼 수 있다.

시대상황이 어려운 난관에 부닥친 것이 분명한 이런 상황에서는, 부처의 공덕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상당한 수행을 닦은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꽃을 뿌리는 믿음으로 미륵보살을 모시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노래는 미륵사상을 읊고 있다. 소박한 한 떨기 꽃 속에 미륵의 대자대비를 바라는 마음은 곧은 마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의 산화공덕은 순수한 불교적인 관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불교의식의 고유 신앙을 받아들인 의미를 암시해 준다.

 

 [글의 얼개]

 성격 : 4구체 향가.  주술가, 찬불의 노래, 제의 가사

 표현 : 위협적인 모습은 완곡한 표현으로 변하였으나, 명령법이 아직도 작품에 남아 있어,          고대 제의에 사용되던 주술적 자취가 있음

 주제 : 사악한 것을 쫓아냄.

 〔붙임〕

 ① <도솔가> : 신라 유리왕 때의 가로 전하여 오지 않음

 ② <진달래꽃> : 산화공덕의 상징성 " 영변의 약산 /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      리오리다. " 물론, <도솔가>에서는 서경적인 묘사를 하고 있지 않다.

 별칭 : 삼국유사에서는 <도솔가>를 "차사사뇌격(嗟辭詞腦格)"이라 하였다. '사뇌가'라                고도 불림

 




















 제망매가(祭亡妹歌)

                  - 월명사 -


 

삶과 죽음의 길은  

여기 있으므로 두려워  

나는 간다는 말도  

못하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한 가지에서 나서  

가는 곳을 모르는구려.  

아아, 극락세계에서 만나볼 나는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리.


生死路隱

此矣有阿米次肹伊遣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叱古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一等隱 枝良出古

去奴隱處毛冬乎丁

阿也彌陀刹良逢乎吾

道修良待是古如


[배경 이야기]

 신라 35대 경덕왕 때 서라벌의 사천왕사(四天王寺)에는 피리를 잘 부는 한 스님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월명이었는데, 그는 향가를 잘 지어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齋)를 올릴 때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노래를 불러 제사를 지냈더니, 문득 광풍이 불어 종이돈이 서쪽으로 날아가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월명 스님이 문득 달 밝은 밤에 피리를 불며 문 앞 큰 길을 지나가니, 달이 그를 위해 가기를 멈추었다. 이로 하여 그 동리 이름을 월명리라 하고, 그의 이름인 '월명' 또한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알고 느끼기]

 신라 경덕왕 때의 월명사가 지은 10구체 향가, 일명 <위영제망매가(爲營祭亡妹歌)>라고도 한다. 죽은 누이의 재를 올리며 미타 신앙을 호소한 불찬 추도가로, 전해 오는 향가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10구체 향가의 전형적 모습인 3단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불교의 아미타 사상을 바탕으로 고도의 비유를 통해서 인간 고통의 종교적 승화를 노래한 작품이다. 그 표현과 서정성이 매우 뛰어난 노래다. 숭고한 불교적 신앙심을 바탕으로 저승의 세계를 지향하는 신라인의 정신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노래에 깔린 정서는, 사랑하는 누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과 죽음 사이에서 깊이 고뇌하며 방황하는 월명의 슬픔과 애절한 그리움이다. 인간적인 그리움이 불교적 내세관을 통해 승화되고 있어 더욱 고양된 이미지를 안겨준다.

이 작품의 표현상의 절정은 5행에서 8행까지의 비유에서 온다. 같은 부모에서 태어났다 헤어짐을 한 가지에 났다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으로 비유한 것이나,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덧없이 부는 이른 바람에 떨어진 잎으로 비유하여 요절의 슬픔과 허무함을 공감각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노래를 구절구절을 읽어 가노라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허망함을 느끼게 하며, 이와 더불어 월명의 불심이 얼마나 절절한가를 느끼게 한다.

 

[글의 얼개]

 성격 : 10구체 향가. 추도가. 서정시가.(추모적, 애상적, 불교적)

 표현 : 비유(직유)법, 상징법

  

구성 : 기, 서, 결의 3단 구성방식

   기(1∼4행) : 누이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인간적 괴로움과 혈육의 정

   서(5∼8행) : 누이와의 속세 인연과 죽음에서 느끼는 무상감

   결(9∼10행) : 슬픔과 고뇌의 종교적 승화

 

 




















 안민가(安民歌) 

          - 충담사(忠談師) -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라.  

백성은 어린 아이라고 할진대  

백성이 그 사랑을 알리이다.  

굴림대를 살리는 것은 중생  

이들을 배불리 먹이고야 다스려 지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지언정  

나라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를 알리이다.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행한다면  

나라야말로 태평하리니.


君隱父也

臣隱愛賜尸母史也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民是愛尸知古如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此肹喰惡支治良羅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國惡支持以支如古如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爲內尸等焉

國惡太平恨音叱如

 

 

[배경 이야기]

 신라 35대 경덕왕 때의 일이다. 3월 삼짇날 왕이 귀정문 문루에 나와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누가 길에 나서서 훌륭하게 차린 중 하나를 데려 올 수 있겠느냐?"

마침 점잖고 깨끗하게 차린 스님이 지나 가는 것을, 좌우에 있던 사람이 바라보고 곧 데려왔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훌륭하게 차렸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그만 돌려보냈다. 또 한 중이 옷을 기워 입고 벚나무로 만든 통을 지고 남쪽으로부터 오고 있었다. 왕이 기쁘게 대하면서 문루 위로 맞아 들였다. 그 통속을 드려다 보니 차 다리는 다구가 들어 있을 뿐이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

중이 말하기를

"충담입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소승이 매년 3월 삼짇날과 9월9일 날은 차를 다리어 남산 삼화령에 계신 부처님께 올립니다. 지금도 차를 올리고 막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하기를,

 "나도 그 차 한 잔을 얻어 마실 연분이 있겠는가?"

중이 차를 다리어 올렸다. 차 맛이 기이할 뿐더러 차의 이상한 향기가 무럭무럭 났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대사의 기파랑을 찬양한 사뇌가는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를 위해서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다스리는 노래를 지으라."

 스님이 당장 임금의 명에 따라서 노래를 지어 바치었더니 왕이 잘 지었다고 칭찬하고 왕사를 봉하였다. 중은 두 번 절한 다음 그 벼슬을 굳이 사양해서 받지 않았다.

 

 [알고 느끼기]

  신라 제35대 경덕왕에 충담사가 경덕왕을 위해 지은 10구체 향가로 참요다. 나라 다슬미의 노래다. 이 노래에서 임금을 아버지에, 신하를 어머니에, 그리고 백성을 어린 아이에 비유하여 "각기 자신의 책임을 다하라"는 유교적 이념이 돋보인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각자 자기 구실을 다하면 나라와 백성 모두가 태평하리라는 정치 이념이 노래에 담겨 있다.

<논어>에 "임금은 예로써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으로써 임금을 섬겨야 한다(君使臣以禮 臣使君以忠)"라는 말이 있다. 군신 사이에 서로 화합하지 않고 어긋남이 생기는 까닭을 공자는 바로 예와 충성의 모자람으로 보았다. 물론 공자가 이른 것은 임금과 신하가 체면만을 내세우는 겉치레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거짓 없는 태도를 말한다.  

이 작품에는 임금과 신하, 즉 국가의 나아갈 길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안민가>에서 말하는 '사랑'의 정신이 잊혀진다고 할 때 모든 것은 한갓 물거품이 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글의 얼개]

 성격 : 10구체 향가, 나라 다스림의 노래. 참요

 표현 :소박한 은유

       논리적 내용 전개. 들을이를 높임.

 시적 화자의 태도 : 청자를 높이는 태도로 교훈적 내용을 노래

 핵심 구절 : 9,10행 → 나라가 태평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공자의 정명사상과 일맥 상통               함)

 주제 : 치국안민(治國安民)의 길과 이상

 의의 : 향가 가운데 유일한 유교적 민본사상의 노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 충담사(忠談師) -

 

구름을 활짝 열어젖히매  

나타난 달이  

흰 구름을 쫓아 떠나간 것은 아니라  

새파란 강물에  

기파랑의 얼굴이 비쳐 있으매  

일오내 자갈밭에서  

임이 지니시던  

마음의 가장자리라도 좇고 싶으오.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눈조차 모르실 화랑이시여.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于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貌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尸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 栢史叱枝次高支乎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배경 이야기]

 기파랑이 화랑이나 누구인가에 대하여는 알 길이 없다. 충담이 경덕왕(재위 742-765) 앞에 나아갔을 때, 임금이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사의 이름을 들었노라 한 대문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면 충담사가 지난 날 기파랑의 문도였음과 기파랑이 인품과 덕망이 높은 화랑임을 알 수가 있다. 기파(耆婆 Jiva)는 인도의 의술을 지닌 목숨을 다스리는 하늘신의 이름이다. 당시에 기파랑을 지파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알고 느끼기]

신라 35대 경덕왕 때. 충담사 스님이 기파랑을 추모하여 지은 10구체 향가로 사뇌가의 대표작이다. 물음과 대답의 문답법을 통한 3단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낙구의 첫머리에 '아아'라는 감탄사가 있어 10구체 향가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준다.

기파랑의 드높은 인품과 이상, 지조를 기리는 것에 있어 한 마디도 달과의 문답체를 빌어 제 9구에서 자연스럽게 정서와 느낌을 형상화 하였다. 처음에는 기파랑의 외모를 그리다가 차츰 그 정신의 드높음을 드러내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 시를 읽노라면 문득 천 년 전 어느 달밤 냇가 흰 모래 위에 홀로 우뚝 서서 멀리 아득히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무한한 그리움과 먼 이상향을 그리던 기파랑의 모습과 인품이 눈앞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기파랑의 고매한 인품에 젖어들게 된다.

 무애 양주동 선생의 <찬기파랑가> 평설에서 "사뇌가 14수 중에서도 누가 보더라도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된다. 이 한 편의 지묘함을 어찌 필설로 다하랴. 표현이 절절하다는 말은 이런 작품을 두고 이르는 것이다."라고 절찬할 정도로 이 작품은 서정성과 서경성이 어우러진 뛰어난 압권이다.

 

[글의 얼개]

 성격 : 10구체 향가. 추도가, 추모가.

 표현 : 문답법,  비유와 상징법, 의인법.

       서경성과 서정성의 조화

 시적 화자의 태도 : 시적 대상을 예찬하고 추모하는 태도

 구성

  *1∼3행 : 화자가 달에게 질문

  *4∼8행 : 달의 대답

  *9∼10행 : 화자의 독백

 주제 : 화랑 기파랑을 추모함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 희명(希明) -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천수관음 앞에  

빌며 사뢰나이다.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 중에서  

하나를 놓아 주시어 하나를 덜어  

둘 다 없는 저에게  

하나만 내리시어 고쳐 주옵소서.  

아아, 저에게 은혜를 끼치신다면  

놓으시어 베푸실 자비여 크오리다.

 

膝肹古召㫆

二尸掌音毛乎支內良

千手觀音叱前良中

祈以支白屋尸置內乎多

千隱手 叱千隱目肹

一等下叱放一等肹除惡支

二于萬隱吾羅

一等沙隱賜以古只內乎叱等邪

阿邪也 吾良遺知支賜尸等焉

放冬矣用屋尸慈悲也根古  

 

 [배경 이야기]

 신라 35대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의 아이가 난 지 다섯 살 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그 아이더러 노래를 지어서 빌라고 하였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 이를 기리어 시를 지었으니,

"막대로 말을 삼고 파로 피리를 불어 골목에서 뛰놀다가 하루 아침 앞이 캄캄, 반짝이는 두 눈동자 어느덧 잃었구나. 만일에 관음보살 인자한 눈을 떠서 돌보지 않았다면 버들가지 휘날리는 몇 몇 해 봄 빛을 헛되이 지냈으리니. "라 하였다.

 

 [알고 느끼기]

 신라 경덕왕 때의 희명이 쓴 10구체의 향가로, 분황사에서 눈을 뜨게 해 달라고 빌며 읊은 불교적인 노래이자 간절한 기도의 노래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세음보살은 주로 일반 중생의 삶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 만일 중생이 그지없는 온갖 고뇌를 받을 때에 이 관세음보살의 일을 듣고 한 마음으로 부르면, 관세음보살은 곧 그의 음성을 듣고 고통 속에서의 해탈을 얻게 한다.

관음사상에 들어있는 "응현(應現)"과 "위난구제(危難救濟) 사상"은 아들을 얻고자 빈다거나, 장님이 눈을 얻는다거나 하는 등 복을 비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렇게 우주의 무수한 관음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나타나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고 어려움을 벗어나게 해주며, 변화 많은 관음의 힘을 실현함으로써 사바세계의 실제적 보살로서 받들어 믿어 온 것이다.

  이 작품은 기원의 노래인 동시에 눈먼 자식의 눈을 고쳐보겠다는 어머니의 사랑을 드러낸  노래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어린 아들의 소리를 듣게 되는데, 사실은 어머니가 지은 노래로 어머니의 감정이 완전히 아이의 것으로 바뀌어 있는 것에 놀라게 된다. 그만큼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따를 때 가능한 일이기에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천 개의 눈을 가진 보살이여. 눈을 하나만 내 아들에게 주소서. 당신이야 눈 하나 주시는 것은 아주 쉽지만, 내 아이에게는 목숨만큼 중요하오리다.' 어머니의 슬프고 절절한 정성이 가슴에 물결친다.

 

[글의 얼개]

 성격 : 10구체 향가. 종교적인 노래.

 주제 : 관음보살의 자비로 아이의 눈을 뜨게 하고자 비는 어머니의 기원

 이름 : <천수대비가>, <맹아득안가(盲兒得眼歌)>


























우적가(遇賊歌) 

          - 영재(永才) -

 

제 마음의  

모습을 모르고 지내려던 날을  

멀리 고락을 겪으면서 알게 되고  

이제야 숲속 절로 가고 있소이다.  

단지 그릇된 파계인의  

두려움에서 다시 돌아올 지혜의 밝음이여  

이 무서운 창칼의 위험을 지나면  

좋은 날이 새리라 여겼더니  

아아, 오직 이 내 몸의 한과 설움은  

아직 새 그릇이 아니 된 것이오.


自矣心米

貌史毛達只將來呑隱日

遠烏逸□□過出知遣

今呑藪未去遣省如

但非乎隱焉破□主

次弗□史內於都還於尸朗也

此兵物叱沙過乎

好尸日沙也內好呑尼

阿耶 唯只伊吾音之叱恨隱㵛陵隱

安支尙宅都乎隱以多  

 

[배경 이야기]

 영재(永才) 스님은 천성이 활달하여 물질에 얽매이지 않았다. 향가를 잘하였는데 늙은 나이에 남산에 숨어 지내려 했다. 하루는 대현령을 지나다 60여 명의 도적을 만났다. 죽이려 했지만 영재는 칼날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의연히 맞섰다. 도적들이 이상하게 여겨 이름을 물으니 영재라 하였다. 도적들이 본래 그 이름을 들었으므로 이에 <우적가>를 짓게 했다.

 도적이 그 뜻에 감격하여 비단 두 필을 주었으나 영재가 웃으며 사양하기를 "재물이 지옥의 근본이 됨을 알고 장차 피하여 깊은 산에 숨어 일생을 보내려 하는데 어찌 감히 받겠느냐." 하고 땅에 던졌다. 도적이 또 그 말에 감동하여 모두 창과 칼을 던지고 머리를 깎고 문도가 되었다. 그리고는 함께 지리산에 숨어 다시 세상을 엿보지 않았다. 영재의 나이는 90이었고 원성대왕 때의 일이었다.

 

 [알고 느끼기]

 이 노래를 통해 우리는 작자가 도적들이 알고 있을 정도로 시가에 능한 스님이었으며, 향가 또한 도적들이 알 정도로 널리 불리던 노래였다. 도적들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영재가 지은 이 노래의 뜻을 이해하고 노래에 감화되었다는 사실에서 신라 말기의 상황은 어느 정도 배움이 있는 사람들도 섞여 도적을 이룬 것이다.

 죽음을 앞두고 의연할 수 있는 영재의 소신에 찬 강인함과 그의 재치와 익살로 인하여, 도둑을 앞에 두고 능히 세속을 뛰어넘은 군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그토록 강한 신념을 일으키는 건 널리 아는 지식이 아니라 소신 있는 현재의 행동과 믿음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가 있다.

 

 [글의 얼개]

 성격 : 10구체 향가, 교훈적인 권계가(勸戒歌), 설도(說道)의 노래

 특징 : 의미의 복합적인 구사를 통한 상징적인 언어가 중첩되었을 뿐 아니라, 원전의 네           글자가 탈락되어 있기에 향가 중에서 가장 풀이가 어려운 작품이다.

 주제 : 보살에의 귀의와 도둑을 교화.

 





























 처용가(處容歌)

        - 처용(處容) -



서울 밝은 달에  

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세.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다마는

빼앗음을 어찌하리.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肐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배경 이야기]

 신라 제49대 헌강왕 때이다. 서울에서 지방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고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길거리에 풍악이 그치지 않고 비바람도 사철 순조로웠다. 이 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에 놀러 나갔다가 곧 돌아오려고 잠시 물가에서 쉬고 있었다. 문득 짙은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상하게 여겨 좌우에게 물으니,

 "이는 동해 용왕의 조화이므로 마땅히 용왕을 위해 좋은 일을 하여 그 마음을 풀어주셔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곧 용왕을 위하여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개었으므로 그곳을 개운포라고 하였다.

이윽고, 동해 용왕이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데리고 헌강왕 앞에 나와 춤을 추며 용궁 음악을 아뢰게 했다. 그 때 용왕의 아들 하나가 헌강왕을 따라 서울에 와서 정사를 도왔다. 이름을 처용(處容)이라 했다. 왕은 미녀를 골라 아내를 삼게 하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어 머물게 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천연두를 일으키는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을 입고 밤에 몰래 들어와 잠을 잤다.

  밖에서 놀다가 밤늦게 돌아온 처용은 그 현장을 보고 노래 <처용가>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갔다. 그러자 역신이 감복하여 나타나서 처용 앞에 꿇어앉아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지금 잘못을 범하였는데도 노하지 않으시니 감격스럽다. 이후로는 맹세코 공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그려 문에 붙여서 병마를 쫓고 경사를 맞는 부적으로 삼았다.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지금의 울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 또는 신방사(新房寺)라 하였으니 용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알고 느끼기]

 이 노래는 헌강왕 대에 임금을 돕던 처용이 밤늦도록 놀다가 집에 돌아오니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함을 보고 지어 부른 노래이다. 언뜻 외설적인 느낌을 갖게 하기도 한데, 전반부의 상황설정은 후반부에서 보여주는 처용의 태도를 부각시켜 신격화하기 위한 극한 상황 설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아내가 외간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 부르며 춤을 추며 물러간 처용의 태도에, 역신 스스로 잘못을 자백하고 물러나고 만다. 처용의 이러한 관용적인 태도는 이 노래의 절정을 이루며 처용의 초극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게 된다. 이르자면 똘레랑스의 극치라 할까.

  이 노래에 대해서는 불교적인 풀이, 사회·역사적인 풀이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있지만 사악함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하는 벽사진경(辟邪進慶)의 노래로 봄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주술적인 노래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벽사진경'을 위해 신라에서는 처용의 가면을 대문에 걸어두는 풍습이 있다고 하니 당시의 풍속과도 배경이 있다. 또한 아무리 악신(惡神)이라 하더라도 즐겁게 하여 화해한다는 우리나라의 무속을 통해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기도 한다.


[글의 얼개]

 성격 : 8구체 향가. 주술가, 일종의 무가(巫歌)

 표현 : 풍자적, 제유법

 화자의 태도 : 관용적, 체념적

 구성

  * 1∼4 : 처용의 유락(遊樂)과 그의 처가 교접하는 장면

  * 5∼6 : 처용의 갈등과 대결의식

  * 7∼8 : 처용의 관용적 정신 발현

 의의

 ① 주술가로서 본격적인 무가(巫歌)의 기원

 ②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의식무로 계승됨

 ③ 가사의 일부가 속요<처용가>에 인용, 한글로 표기되어 전해짐으로써, 향찰 문자 해독의      중요한 열쇠가 됨.

주제 : 아내를 범한 역신을 감복시켜 내쫓음.

 

[붙임]

 처용의 정체에 대한 풀이

⑴ 민속 신앙적 관점 : 처용이 무당이면서 동시에 무신이기도 한 동해 용신(龍神)을 주신으로 섬기는 강신무라고 보는 풀이

⑵ 불교 신앙적 관점 : 처용은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용이고, 그가 임금을 돕는 것과 가무(歌舞)는 많은 이를 교화하는 임무 수행이자 불교적 교화의 의미를 지님.

⑶ 역사 사실적 관점 : 처용은 중앙 정권에 승복하지 않는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는 풀이

⑷ 신라 시대 서역지방과의 교역이 있었음을 근거로 해서, 처용을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 는 풀이.

 

-어느 카페에서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