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cm의 知性

경주 불상 자료

선덕여왕연구자 황명강 2009. 6. 23. 21:52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삼존불상


원래는 경주 남산의 북봉에서 옮겨온 것으로 현존하는 삼국 시대의 석조불상 중에서 매우 큰상이며 보존상태도 좋은 편이다. 본존은 두다리를 내리고 의자 같은 곳에 걸터앉은 倚象으로 인도나 중국의 상에서 많이 보이는 형식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드문 예이다. 머리와 손 부분이 불신에 비해 큰편이고 얼굴의 형태도 크고 둥글어서 조각적인 양감이 비교적 강조되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몸에 얇게 밀착되어 불신의 굴곡 및 팔 다리의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좌우의 보살입상은 그 얼굴 모습이 단아하고 복스러워서 '애기부처'라고도 불린다. 두 보살상 또한 몸체에 비하여 머리가 큰 편이며 삼면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둥글며 미소를 띠고 있는데 부은 듯한 눈의 표현이 여래상에서와 같다. 손의 형태는 서로 달라서 좌협시보살은 오른손에 긴 줄기의 연봉을 가슴쪽으로 올려 들었고 왼손은 둥근 지물을 배 근처에까지 올려 들고 있다. 우협시보살은 오른손에 무엇인가를 잡고서 배 근처에 대고 있으며 왼손은 어깨까지 올려서 둥근 모양의 지물을 들고 있다. 천의는 양어깨를 덮고 흘러 내려와 가슴에서 한 번 몸에 가로질러 걸쳐지고 다시 부근에서 U자형으로 늘어지며 ,그 끝은 양팔에 감겨 다리 옆으로 길게 늘어지고 있다. 이 삼존 불상의 자세, 법의와 천의의 처리 의습선의 조각수법은 삼국 시대의 7세기에 들어서서 나타내는 새로운 불상양식으로 중국의 수나라 내지는 당나라 초기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 잘 반영된다.

 


장항리 석조여래입상


장항리의 절터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으로 완전히 부서진 것을 접착하여 상반신만 복원된 상태이다. 현재 장항리사지의 金堂址에는 이 불상의 대좌가 남아 있다. 이 불상의 대좌에는 獅子文과 연화문이 조각된 팔각형대좌이다. 삿갓골 석조여래입상처럼 이 불상도 대좌만 별도로 만들고 광배와 불신이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다. 촘촘히 새긴 나발의 머리위로 육계가 큼직하며 눈썹은 시원하다. 귀는 길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가슴이 당당한 자세이다. 법의는 통견이며 가슴에 굵게 걸친 옷주름은 얇고 유연하여 몸의 볼륨을 강조한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 위로 올리고 있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리고 있는 듯하나 파손되어서 알 수 없다. 광배는 舟形이며 두광과 신광둘레에 화염문을 새기고 구름 위의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는 화불을 주위에 표현하였다. 약간 붉은 색의 화강석에다 원숙한 솜씨로 사실적인 조각을 한 大佛이다.

 


골굴암마애여래좌상


기림사 골짜기에 위치한 골굴암의 높은 암벽에 있는 자연굴을 이용하여 조성한 12개의 석굴 중 가장 윗부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원래는 木造前室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마애불의 석질은 고르지 않아 무릎 아래가 떨어져 나가고 가슴과 광배 일부가 손상되었으나 전체적으로 강건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다. 소발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얼굴은 윤곽이 뚜렷하다. 입체감이 두드러진 얼굴에 비해 신체는 평면적이어서 신체의 조형성이 감소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옷주름은 평판을 겹쳐놓은 듯 두 팔과 가슴, 하반신에서 규칙적인 평행선을 그리고, 겨드랑이 사이에서는 V자형으로 표현되어 팔과 상체의 굴곡을 나타내고 있다. 암벽에 그대로 새긴 광배는 머리주위에 끝이 뾰족한 단판 연꽃을 배치하여 두광으로 삼았으며 두광과 佛身사이에는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좌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다.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통일 신라 후기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산 상선암마애불


남산의 삼릉계곡의 등산로를 따라서 올라가다 정상에 조금 못미쳐 이 불상이 있다. 머리 부분은 바위면에 볼록하게 튀어나오도록 부조하였으며 머리를 제외한 몸과 대좌 부분은 선각을 하여 마치 미완성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불상이 있는 위치에서는 남산의 기암괴석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경치가 멋있어 이곳에서 잠시 눈이 머물면 신라인들이 왜 남산에 이렇게 많은 부상들을 새겨놓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다.

 

 

 

南港寺址 석불 입상


삼국사기에는 三浪寺 남항사지라 하였는데 남항사지가 이곳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光背는 갖추고 있으나 얼굴이 파손되어 알아볼 수 없는 석불 입상이다. 발목 부분은 땅에 매몰되어 있는데 통일 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전한다.

 


*碧桃山 東麓 석불 입상


두대리부락 남방에 있는 저수지 서편 산록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위치에서 이동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으며 시나 중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현재 높이는 165cm이다.

 


*南山佛谷石佛坐像


남산 東麓인 佛谷의 한 암석에다 길이가 1m가 되는 감실을 파고 거기에 불상을 높이 새긴 마애불이 있다. 주위에 산재하는 瓦片과 바위의 가구 흔적으로 보아 목조 전실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며 이는 磨崖石窟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점에서 인왕동 석불 좌상과 유사하지만 이 불상은 확실히 여성적이며 그래서 菩薩적인 인상이 짙다.

 


*仙桃山 마애삼존불


仙桃山頂 大岩面에 17m나 되는 거구의 본존을 조각하고 협시보살들은 딴 돌로 마련한 삼존불상이다. 불상도 훼손이 많이 입고 있는데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고 얼굴도 누까지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남아 있는 뺨,턱,눈 등 표현은 고졸한 미소가 보인다. 신체는 굴곡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 원통형으로 보인다. 시무외 여원인의 곤 수인은 고식인 것이다. 通肩의 법의는 묵직하여 U형의 의문이 성글게 표현되었다. 왼쪽 보살은 머리,몸,다리,대좌로 4분되었지만 완전히 복원이 가능하다, 오른쪽 보살도 왼쪽 보살과 동일하며 다만 얼굴의 윤곽이나 손 모양이 다를 뿐이다. 남성적인 힘을 강하게 풍긴다.

 


미륵곡 마애석불 좌상


보리사의 동으로 산길을 돌면 마애여래가 있다. 높이 11.5m의 광배형의 감실을 파고 그 안에 높이 1m의 여래상을 조각하였는데 원만한 얼굴에는 미소를 띠었고 옷은 두꺼우며 옷자락의 1단이 두 무릎 사이에 늘어지고 있다. 불상이 보리사 불상보다 후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보리사 석불좌상


광배와 대좌를 모두 구비한 이 불상은 본질적으로 석굴암 본존불과 흡사하지만 형식화가 많이 진전된 불상이다. 목 이상은 딴 돌로 끼었는데 나발의 머리에는 육계가 높직하다. 얼굴은 둥글지만 풍만하지 않으며 조용히 발산되는 이 불상의 미소는 8세기 신라인의 정신적인 승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비범한 조각 솜씨를 웅변하3고 있다. 목에는 명확한 삼도가 있다. 어깨는 약간 움추렸으며 가슴은 풍만한 편이지만 평판적으로 되고 있다. 인체적 비율과 함께 8세기 불상의 이상형으로부터 9세기 양식으로 이행을 예기한 것이기도 하다. 항마촉지인의 손이나 팔은 연약하게 표현되었으며 하체는 다소 딱딱하게 처리되어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광배는 舟形巨身光으로 되었다. 광배 뒷면에는 약사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통일 신라 시대의 불상이다.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부처골 어귀에서 남쪽으로 약 300m쯤 가면 작은 마을이 있으니 이 마을이 탑골 마을이다. 남산의 네째 골짜기인 탑골은 전망대 부근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향해 흘러오다가 해목령에서 흘러오는 옷밭골 여울을 합쳐 옥룡암을 지나고 탑골을 지나 남천으로 흘러드는 개울이다. 탑골마을에서 개울을 거슬러 약 40m쯤 들어가면 유명한 부처 바위와 삼층 석탑이 서 있다. 부처 바위는 높이가 약 9m이고 둘레가 약 30m되는 큰 바위다. 이 바위는 사면에 여래상,보살상,비천상,나한상 및 탑과 사자상등을 새겨 四方四佛淨土를 나타내었으므로 부처 바위라 부르고 있다.

 


狼山 마애삼존불


狼山西麓에 있는 최치원의 독서당 南方山 중복에 있는 부각된 마애석불좌상이다. 부근에는 불상대석이 있으며 초석등도 밭가운데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보살상은 경주 박물관에 있다.

 


동천동 불상대좌


백율사 도로북방에 경작지 내에 산재하고 있으며 사면에 불상이 부각되어 있고 상부에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으로 보인다. 하부에는 양쪽 끝이 우주(모서리 기둥)가 있고 면석에 있는 불상은 頭光과 身光이 있으며 육계가 유난히 커 보인다. 수인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안강읍 근계리 석조 여래 입상


용화사에서 서쪽으로 400m떨어진 용화전내에 있는 것으로 광배가 있고 광배 뒷면에는 初層塔身에 여래좌상이 새겨진 3층탑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머리 부분 및 광배 일부가 결실된 것을 시멘트로 보완한 것으로 윗면이 평평한 나발의 머리와 긴 얼굴에 형식적으로 만든 것과 같은 가까이 붙은 크게 뜬 눈,삼각진 코,작은 입, 짧은 귀 등과 더불어 이상한 인상을 준다. 법의는 통견이고 목부분은 시멘트로 후에 보수하여 삼도의 유무를 알 수 없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 불상군


고신라시대의 작품으로 東南北 3면에 병립한 높이 12-15m의 화강암 자연 암벽에 새겨진 佛像群으로 동쪽에는 높이 6m정도의 釋迦佛立象을 양각하고 북쪽에는 오른쪽에 높이 9m정도의 석가불입상을 양각하고 왼쪽에는 상부에는 약 1-1.5m정도의 입상 3구와 반가좌상이 그리고 하부에는 60cm정도의 입상1구가 양각되어 있으며 남쪽에는 중앙에 약 6m의 입상이 양각되었다.

 


건천읍 신평리 비로자나불


습들불지 못뚝에 위치하고 있다. 佛頭가 결실된 불상으로 법의는 通肩으로 좌상이다. 양손은 몹시 마멸이 심하여 수인의 형상을 알 수 없다. 전체적으로 衣文,衣習 등이 몹시 마멸이 심하고 대좌는 下臺臺座가 八角單 伏蓮圓形의 대좌이다. 八角竿柱石을 받칠 수 있게 되어 있으나 현재는 없다.



백운대 마애석불좌상


백운대 부락 동쪽 마석산 支峯에 높이 7.28m 폭 15.16m의 각형 암벽 위에 원형으로 파고 새겨진 높이 4.56m의 미완성 釋迦如來立象으로 두부는 나발에 육계가 뚜렷하며 풍만한 얼굴에 半開한 문,큰코,작은 다문입,큰귀에 복에는 삼도가 있다. 수인은 시무와 여원인이며 두부가 완성되었고 그 외에는 미완성인 것 같다.

 


벽도산 석불입상


두대리사지 북편 능선상에 암석군 속에 풍화된 석불입상 1구가 유존하고 있다. 원형 광배를 갖고 있는 입상으로,광배는 원형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상부의 일부가 심하게 마멸되어 있다. 불두에는 육계를 갖추고 평발의 형식이다. 양어깨에 걸쳐 있는 의문은 통견으로서 무릎 아래까지 衣習이 U자 흐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좌우에는 주름잡힌 의습은 발밑까지 내려있고 불상의 왼손은 배부분에 ㄱ자형으로 되어 있다. 불상 전체 형식으로 보아 통일기 후의 불상으로 보이며 목에는 삼도를 각출했으나 풍화에 의하여 마멸이 심하고 양손에는 하등의 지물을 갖지 않고 있다. 남향하여 두대리 마애삼존과 마주보고 있다.

 


두대리 석불입상


벽도산의 서향한 바위에 삼존불을 조각하고 목조의 전실을 조영하였던 마애 석굴사원이 있다. 여기 삼존불은 8세기에 급격히 진출하던 아미타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형태로 보이는 흥미있는 불상이기도 하다. 소발의 머리는 아주 큼직하며 육계는 낮아서 모자를 쓴 것처럼 보이는데 굴불사의 아미타여래와 같은 양식이다. 얼굴은 풍만하며 비만으로의 진전을 보이는데 미소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결코 미련하지 않다. 어깨는 넓고 반듯하며 법의를 얇게 하여 몸의 굴곡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바른손을 내리고 있으며 왼손을 가슴에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데 이것을 서향이라는 방위와 함께 이 불상이 아미타여래라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이 불상들은 모두 선조원형 두광을 하고 있으며 대좌는 경주 남산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연화대좌이다.

 


경주 배리 석불입상


도괴되었던 것을 모아 조성한 것으로 그 기본양식이 같아 원래 삼존불로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얼굴 몸아 모두 어린아이의 것을 直模하였다. 주존불의 머리에 육계는 이중으로 되어 있고 소발이며 풍만한 사각형의 얼굴에 둥근 눈섭,아래로 뜬 눈,다문입,깊이판 보조개,살찐 뺨 등을 묘사하여 신비한 미소를 띠고 있다. 머리는 목 없이 원통형의 체구에 올려져 있고 어깨선을 제외하고는 몸의 볼륨은 느낄수 없다. 수인은 여원인을 발 뒷꿈치를 높게 하였고 통견의 법의는 묵중하며 전면에 U자형 의문이 4줄 있으며 광배는 두광 뿐이나 거의 깨어졌다. 왼쪽 관음보살은 좀 수척한 편으로 삼산보관을 쓴 얼굴은 눈을 바로 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띠고,가는 허리를 뒤틀고 바른손은 가슴에 들고 왼손은 내려서 보병을 잡고 있다. 장식은 별로 없으나 천의는 무겁게 보이며 원형의 두광의 문양이 분명치 않다. 오른쪽 불상은 본존불에 가까우며 특히 장식적으로 목걸이는 현저히 굵고 삼조선에다 가운데 큼직한 꽃을 장식하고 천의는 턱도 없이 무겁고 굵은 염주가 발등까지 드리워 있고 왼손을 가슴까지 들어 연꽃을 잡고 있고 바른손은 배에 살짝대고 원형두광에는 화불5구가 있고 사이마다 큼직한 화문이 배치되어 있다. 대좌는 원통형으로 아래위로 伏 蓮華文을 仰伏蓮되게 조각하였다. 장식적 효과와 기본수법은 中國隨代의 보살과 흡사하며 삼국 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남산 삼릉계 마애관음보살상


北南山 최고봉에 광배형의 자연암벽에 조각된 釋迦說法의 대불상으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螺髮의 머리,풍만한 얼굴,감은눈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상의문이 화려하게 선각되어 있다.

 


남산 삼릉계 마애여래좌상


자연 암벽에 선각된 좌상으로 광배가 있고 법의는 통견이며 동그란 얼굴에 눈을 감고 코와 입술은 두툼한 입술이 특이하다.

 


남산 윤을곡 마애삼존불


자연암 2개에 한족에 2구,다른 하나에 1구의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가운데 주존불은 머리에 육계가 있고 법의는 통견이며 수인은 시무외여원인을 짓고 광배가 있으며 결가부좌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불상은 법의는 우견편단,바른손은 무릎위에 얹고 왼손은 가슴에 들어 보주를 갖고 결가부좌하였다.

 


남산 삼릉계 선각육존불


좌우 자연암벽위에 6구의 불상이 선각되어 있는 것으로 오른쪽 벽에는 主佛立象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이 좌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왼쪽 벽에는 主佛座象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보살이 입상으로 선각되어 있으며 대략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주군 서면 석조비로자나불


아화리 심곡부락 심원사 경내에 있는 것으로 결가부좌의 비로자나불좌상으로 법의는 통견으로 되어 있다. 좌상의 형태는 결가부좌하고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형상으로 현재 결실되어 정확한 형태 파악은 곤란하다. 화강암재이며 이 불상곁애 복부만 잔존하는 보살사의 파편이 있다. 일부 잔존하는 파편을 관찰하면 목에는 염주를 걸쳐 가슴까지 흘러내렸고 衣文은 현상태로 보아 우견편단한 좌상이다.

 


굴불사지 석불상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덕왕이 백율사에 행차하려고 산 아래에 이르자 땅속에서 佛聲이 있음을 듣고 파 보도록 명령하여 대석을 얻으니 사서에 불상을 새겼으므로 인해서 절을 일으켰다. 서쪽 아미타여래, 동 약사여래, 북 미륵, 남 석가의 사방불이다. 서쪽의 아미타여래는 삼존불이며 동서상은 결가부좌한 자세로 몸전체가 앞으로 숙여지고 있다.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는데 동방 약사인 것은 명백하다. 서면상은 왼쪽의 高彫한 상과 바른쪽의 음각상인데 마멸이 심하다. 남면상은 원래는 삼존불인데 일제때에 바른쪽 보살상을 완전히 떼어 가고 여러가지 여건으로 보아 불상들은 경덕왕때 제작되었을 것은 틀림없을 듯하다.

 


百栗寺 금동약사여래입상


현재는 국립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국보 제 28호이다. 1930년에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等身大의 이 금동불상은 중후한 인상을 풍겨주는 금동불상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서 크지 않은 편으로 인체 비례에 가까우며, 옷자락과 신체의 표현에 있어서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 수인은 두손이 결실되었지만 그 형태로 보아 시무외여원인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불상의 조성 연대는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남산 삼릉계 석불좌상


원래는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추었으나 광배가 크게 파손되어 윗부분이 3부의 1정도 결실된 상태로 불상대좌 뒤쪽에 방치되어 있고 불상 또한 얼굴 부분이 코밑에서 턱까지 많은 손상을 입어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뚜렷하다. 이 불상은 나발의 머리에 큼직한 육계를 하고 있는데 얼굴은 아래 부분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풍만하고 둥글며, 두 뒤는 짧게 표현되었다. 법의는 우견편단을 하고 있으며 수인은 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어 석가불로 추정하고 있다. 광배는 둥근 두광과 신광이 돌출선으로 구분된 舟形의 거신광배는 안쪽에 연화문과 당초문을 새겼고 주위에는 화염문을 둘렸다. 대좌는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팔각의 연화 대좌로 상,중,하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리 불상은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초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좌상


칠불암 뒤쪽의 높은 절벽에 새겨진 통일신라후기의 마애보살반가상으로 절벽의 바위면을 얕게 파고서 高浮彫로 새긴 마애불로서 머리에는 높은 삼면보관을 썼으며 그 위에 髮 가 솟아 있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정제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두 볼이 쳐져 비만해진 모습이다. 천의는 약간 비만한 몸의 굴곡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무릎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두 손은 가슴앞에 들어오른손에는 꽃가지를 쥐고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맞대었으며 오른발은 대좌아래로 내려 연꽃 족좌를 밟고 왼다리를 무릎위로 올려 유희좌에 가까운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좌는 옷자락이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로서 옷주름은 고식의 기하학적 무늬를 띠고 있다. 광배는 바위면을 舟形으로 얕게 파내어 거신광으로 삼고 그 내부의 세 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별하였다. 이 마애보살상은 전성기 통일신라 조각양식에서 조금 벗어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


불국사 비로전에 봉안된 통일 신라 시대의 비로자나불상으로 높이는 177cm로 현재 국보 제2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금동불상으로 대좌나 광배는 남아 있지 않고 불신만 남아 있다. 얼굴은 길면서 근육이 부풀어 백률사금동약사여래입상과 비슷하게 보인다. 이불상의 얼굴은 9세기에 크게 유행하던 형식이다. 수인은 왼손이 아래, 오른손이 위로 올라간 비로자나불의 지권인으로서 일반적인 지권인과는 반대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불상은 극락전에 봉안된 금동아미타여래좌상돠 함께 <<佛國寺寺籍記>>가운데 최치원이 찬한 <비로자나문수보현상찬>의 내용과 같이 진성여왕이 화엄사상에 의해서 조성한 불상으로 생각된다.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불국사 극락전에 봉안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현재 국보 제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177cm로 비로전에 봉안된 금동비로자나불과 같은 양식을 보여주는 불상이다. 이 형태는 한마디로 '긴장감이 이완된 장대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표현은 남성상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이완된 근육이라든지, 둥글둥글한 어깨선, 그리고 부드러운 옷주름등이 이불상의 이완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불상은 8세기에 제작된 석굴암 본존불의 특징과는 다른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는 불상으로 당시 불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석굴암본존상


불상을 봉안하기 위해서는 불신과 더불어 장엄구로서 대좌와 광배를 갖추어야한다. 석굴암 본존도 연화문을 새긴 둥근 대좌 위에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다. 광배는 불신에 직접 부착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따르지 않고 불신과 떨어져 뒷벽의 십일면관음보살상보다 조금 높은 곳에 둥근 연화 판석 1매를 끼워 넣는 특이한 방법으로 조성하였다. 이 석불 좌상은 신라 통일 직후인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신라 일대와 그루 고려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 좌상의 기본 양식을 갖추고 있다. 그 기본 양식은 먼저 옷차림의 양식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만 감싸는 우견편단이라는 점이다. 다음으로 수인인데 오른손이 항마촉지인(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땅을 짚어 부처의 진리를 증명하는 뜻을 지닌 손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석굴암의 본존은 불교 문화권에서고 으뜸가는 불상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 종교 미술품 가운데서도 매우 뛰어난 존재이다.

 


남산 용장곡 삼륜대좌불


남산의 능선을 따라 형성된 용장사지 빈터의 삼층 석탑형 대좌위에 안치되러 있는데 머리 부분은 없다. 1923년에 대죄에서 굴러 떨어진 것을 복구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현유가조(賢瑜伽條)에 기록된 용장사의 보살형 미륵상인 미륵장육상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앉은 자세는 결가부좌이며 수인은 특이하게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왼손을 외쪽 무릎위에 자연스럽게 놓아 언뜻 보면 降魔觸地印을 좌우로 바꾸어 놓은 듯 하다. 옷은 통견이며 衣文線은 조각도로 약간씩 빚은 것처럼 처리하여 자연스러운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가슴에는 승각기의 깃이 굵게 표현되어 있고 이것을 몪는 띠매듭까지 나타나 있다. 왼쪽 어깨에도 또 하나의 띠매듭이 있는데 이것은 가사를 묶는 띠로서 어깨 뒤쪽의 고리에서 어깨로 내려와 무릎 아래까지 이어져 있고 그 끝은 수술로 장식되어 있다. 3층으로 구성된 대좌는 기단부가 자연석이고 간석과 대좌가 탑신과 옥개석 모양으로 구성되고 있는데 모두 둥근형의 특이한 형태이다.

 


경주남산 용장사지마애불좌상


지상에서 높지 않은 암면에 새겨졌고 광배 대좌를 갖추었다. 불상 머리 모양은 나발이고, 육계의 표현은 분명치 않다. 얼굴은 비만형이라 할 수는 없지만 볼을 두껍게 하고 턱에 군살을 묘사하는 등 비교적 풍만한 편이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어 손끝을 아래로 내렸으며 왼손은 다리 위에 올린 降魔觸地印으로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법의는 통견으로 매우 얇게 빚은 듯한 의습인데 옷주름선들을 일정하게 평행시킨 평행밀집주른이다. 얼굴 형태는 감산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이나 남산 미륵곡의 보리사석불좌상과도 서로 통하며 특히 얼굴이나 체구,의문 등에서 굽타기의 마투라불들과 친연성이 강한 독특한 불상이어서 굽타불의 수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경주 남산 칠불암마애석불


바위면에 부조한 삼존 불상과 그 앞의 돌기둥에 부조한 4구의 불상 등 모두 7구의 불상이 있어 칠불암으로 불리어 오고 있는데 유구의 상태로 보아 원래는 석경을 벽면으로 세운 일종의 석굴사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존불상은 426cm 높이의 바위면에 꽉차게 부조한 마애불로서 거의 환조에 가까운 高浮彫로 되어 있다. 본존의 높이가 260cm나 되는 거대한 좌상이며 두 협시보살도 210cm로 인체보다 훨씬 장대하다. 본존은 머리가 둥글고 큰데 소발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하여 박진감이 넘치며 부풀고 곡선적인 처리로 자비로운 표정을 띠고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두 손이 유난히 큼직하다. 법의는 우견편단(右肩偏袒)인데 상체의 옷주름은 곡선적인 계단식 주름이며 옷깃은 반전되어 있다. 대좌는 앙련과 복련의 2重蓮華座로서 단판7엽이다. 광배는 보주형(寶珠形)의 소박한 무늬를 두드러지게 표현하였다. 협시보살은 좌우 모두 동일한 모습에 비슷한 양식을 나타내고 있는데 왼쪽 보살은 꽃을 들고 있고 오른쪽 보살은 정병을 들고 있다, 둘 모두 본존쪽을 향해 몸을 약간 비틀었다. 사방불은 네 상 모두 연화좌에 보주형 두광을 갖추고 결가부좌하였다. 동면상은 통견으로 법의가 다소 둔중하다. 왼손에는 약합을 들고 있어서 약사여래로 추정하고 있다. 남면상은 여러면에서 동면상과 비슷하나 가슴에 표현된 군의의 띠매듭은 새로운 형식에 속하며 옷주름이 상당히 도식화되어 있다. 서면상은 동면상과 북면상은 남면상과 서로 유사하나 북면상은 다른 세 불상과 달리 특히 얼굴이 작고 갸름하다. 이 네상의 명칭은 확실하지는 않으나 방위등으로 보면 동면상은 약사여래상,서면상은 아미타여래상으로 볼 수 있다. 이 불상군의 조성 연대는 통일신라 최성기인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남산 약수골 마애대불


이 곳은 골짜기라고는 하나 뾰족뾰족한 바위가 성같이 둘러싸인 곳이다. 이중에서 가장 높은 바위는 높이 17m가 되는데 그 남쪽면에 석가여래 입상이 새겨져 있다. 두 손의 엄지와 장지를 마주 집어 왼손은 가슴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 앞에 들어 설법인을 하고 서 계신 모습이다. 왼쪽 어깨에서 가슴으로 비스듬히 빗겨 내린 가사의 옷주름은 파문이 일 듯 점점 크게 넓어지는 주름무늬로 물결쳐 내려와 강하게 위어진 상현선으로 가사의 끝이 맺어지며 그 아래로 그려진 군자락이 발 등을 덮고 있다. 양쪽 팔에 걸쳐 수직으로 드리워진 옷자락의 주름들은 어깨에서 무릎까지 힘차게 흘러 내려서 직선과 곡선의 대조를 살린 절묘한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 불상의 머리는 소금강산 사면석불이나 안동 제비원 불상처럼 만들어 몸체에 얹었던 것인데 지금 그 근처에는 삼도가 새겨진 목이 남아 있다.

 


남산 약수골 여래좌상


언덕위에 단을 모으고 화려한 방형대좌에 석가여래상이 안치되어 있다. 하대석은 24엽의 복련으로 되었고 상대석은 앙련으로 되었는대 앙련화의 꽃잎은 특이하다. 두 개의 생기 있는 고사리 모양을 마주 새겨 꽃잎 윤곽을 만들고 그 안에 해무리 무늬로 장식한 화려한 것이다. 하대석 꽃무늬가 두 개의 돋을 새김으로 입체감을 나타낸 보통 신라 연꽃의 굳센 표현인데 비해 상대석 꽃무늬는 드물게 보는 화려한 것으로 되어 있다. 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은 석가상은 우견편단으로 가사는 한 옷이 얇고 부드러운 옷주름은 풍만한 부처의 몸체를 조용히 흐른다. 이 불상의 연대는 석굴암보다 후대인 9세기 초기를 전후한 시대로 추정된다.

 


남산 심수곡 석조여래상


이중 연화대좌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표시하고 있는 모습은 석굴암 본존불을 본뜬 것이라할 수 있으나 이 불상은 신라 말기의 것이다. 체구가 빈약하고 조각 솜씨가 서툴을 뿐 아니라 앙련대가 지나치게 무거워 균형이 맞지 않는 등 여러 가지 결함은 전성기의 조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좌의 하대석은 8각인데 8엽의 복련꽃이 새겨져 있다. 하대석위에는 8각 중대석이 놓여 있는데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기지 않았다.

 


남산 삿갓곡 석가여래입상


연꽃 위에 서서 오른손을 가슴에 올려 설법인을 표시하고 눈을 가늘게 떠서 고요히 아랫세계를 굽어보는 모습을 나타낸 상이다. 머리는 나발로 나타나 있는데 육계는 우뚝 솟아 근엄해 보이고 두 귀는 곡선을 그리면서 어깨 부근까지 드려졌는데 귓밥에는 살이 많아 따스한 느낌이 든다. 목에도 부드러운 삼도가 새겨져 있고 통견으로 입은 가사자락이 덮여져 있는 두 어깨는 둥그스럼하다.지금 이 불상의 허리 아래는 깨어져 없어졌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 엉덩이 부분이 토막으로 남아 있다. 두광과 신광으로 구성된 광배는 매우 아름답다. 머리 뒤에는 보상화를 둥글게 나타내고 그 양가로 연꽃 위에 앉아 두손을 합장하는 화불이 구름을 타고 날아오르는 모습이다. 두광과 신광사이 가장자리에는 불길 대신에 생기있는 당초무늬를 새겨놓았다.

 


영지 석불좌상


이 석불상은 光背와 대좌를 완전히 갖추었지만 각 부분에 손상이 상당히 있다. 얼굴은 파손이 심해서 알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건장한 신체와 허리,量感있는 무릎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석불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대표적인 석불상이라 하겠다. 특히 오른 어깨를 두러내 우견편단(右肩偏袒)의 佛衣,항마촉지인의 손 모양 등 석굴암 본존불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귀중한 불상의 하나이다. 상.중.하대의 구성을 한 팔각연화대좌에는 섬려한 연꽃무늬와 안산이 새겨져 있으며 불신과 한돌인 광배에는 번잡한 불꽃 무늬 안에 화불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어 당시의 대좌와 광배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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