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신문 창간 20주년 특별기획 / 경주의 문화·관광 그 빛과 그림자 9,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남산지구’
삼릉, 경애왕릉을 가다.
삼릉입구
삼릉 오르는 길
삼릉 전경
삼릉에서 경애왕릉으로 건너가는 교량
경주만의 멋진 이정표
도로변 경애왕릉 표지석
경애왕릉
경애왕릉에서 도로변까지 오솔길
<삼릉> 시내에서 출발해 오릉을 지나고 승용차로 10여분 달리면 포석정에서 400여m 거리 좌측에 삼릉이 있다. 도로에는 삼릉 표지석이 있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오솔길 따라 걸으면 그 끝에 신라 세 분의 왕을 모신 능이 나타난다. 삼릉이라고 하면 소나무가 떠오를 만큼 오래된 소나무숲이 둘러싸고 있는 능은 서편이 신라 제8대 아달라왕, 가운데가 제53대 신덕왕, 동편의 능이 제54대 경명왕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모두 박씨인 세 임금의 주요 업적을 안내문에서 찾아보면 아달라왕(154-184)은 백제가 침입해 백성들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해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했고 왜에서는 사신을 보내오기도 했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가 바로 아달라왕 때 일어난 일이었다고 전한다. 신덕왕은 신라 후기에 후백제의 견훤과 궁예의 침입에 맞서 싸운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다. 경명왕은 신덕왕의 아들로 왕건과 손잡고 견훤을 대야성에서 물리친 기록이 있으나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아우인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견훤에 의해 생을 마치는 묘한 인연이 이어졌다.
삼릉을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숲은 전국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멋진 곳이며 이곳에서 출발해 남산을 오르면 보물급의 여러 불상을 만나게 된다. 소나무 사이로 트인 하늘을 쳐다보고 있으면 해송에 가려진 바다를 보는 듯한 느낌도 든다. 얼마 전에 다녀온 오릉에서도 고송이 묵묵히 능을 지키고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경주 남산의 서편기슭은 신라시대 박씨 왕족의 터전이었을까.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왕과 알영왕비, 남해왕, 유리왕, 파사왕을 모신 오릉과 7대 일성왕릉, 6대 지마왕릉을 지나서 만나는 삼릉과 경애왕릉에 이르면 미루어 짐작이 간다. 특히 도굴된 이후 1965년 발굴을 실시한 傳신덕왕릉은 횡혈식석실분으로 동서 벽에 붉은색, 황색, 백색, 청색이 칠해져 있다고 한다. 자손 없던 효공왕 사후 헌강왕의 사위인 신덕왕(박경휘)이 왕위에 올랐으나 국운이 기울고 있던 신라였으니, 파란 잔디가 자라고 있는 능 너머로 전장을 누비던 왕의 발자국소리가 바람결처럼 스쳐간다.
<경애왕릉> 신라 제 55대 경애왕릉은 삼릉 옆에 있다. 삼릉에서 곧바로 작은 돌다리를 건너 경애왕릉 앞에 서면, 고즈넉한 풀잎의 언어들이 흔들리고 있다. 포석정에서의 비운도 한 때의 영화도 능을 스쳐 지나가는 구름처럼 무상하다. 그러나 이 무상한 역사의 한 조각을 더듬는 것도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리라.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라는 경애왕의 재위 기간은 924년부터 927년으로 기록돼 있다. 왕릉 주변에는 소나무 외에 산딸기 꽃이 한창이다. 저만치 삼릉계곡을 오르는 관광객의 모습이 보이고 여러 갈래의 오솔길이 천 년 전으로 돌아간 듯 슬렁슬렁 편하게도 걸어간다.
<빛과 그림자> 삼릉과 경애왕릉은 문명의 손길이 많이 미치지 않아서 빛난다. 대로변 표지석에서 능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의 향기가 좋고 제멋대로이나 긴 시간을 굳건히 버텨온 소나무들의 몸짓이 좋다. 능을 둘러싼 철책이 미관상으로는 좀 거슬리지만 유적을 보호한다는 점에서는 도리가 없다. 경애왕릉 주변의 산딸기가 눈길을 끈다. 어지럽게 피어나는 꽃들에 빨간 산딸기가 열리면 애틋한 정취를 더해주리라. 주차시설은 넉넉하고 소나무 그늘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해지니 경주의 보물 중에서도 앞자리라 하겠다.